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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목사(하늘소리 문화원장)

 

“돈 많이 벌어 올게.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우리 딸.” 그 한마디를 남기고 내가 중학생 때

아버지는 사업을 하러 브라질에 가셨습니다. 이미 국내에서 사업 실패로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한

아버지는 달랑 비행기 값만 들고 떠나셨지요. 그러자 십 년 넘게 살림만 해 오던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수신자 부담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브라질에서 김광수 씨가

전화하셨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평소 같았으면 “네.” 하고 대답했을 텐데, 그 순간

문득 전화비가 많이 나온다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라 전화를 연결해 주는 분께 말했습니다. “

어머니 안 계시니까 나중에 전화하시라고 해 주세요.”

일주일 뒤 어머니는 새벽녘에 전화를 받고는 울먹이며 말씀하셨지요. “아빠가 브라질에서 돌아

가셨단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 며칠 전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를 거절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을 얼마나 원망하고 후회했는지요.

아버지의 병명은 스트레스로 인한 대동맥 파열. 아버지는 식사할 돈이 없어 하루에 자두와

바나나 한 개로 배고픔을 견디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께 너무나 무관심했던 나. 아버지가 값싼 자두로 끼니를 때우면서 하루하루를 버틴 것이

모두 가족을 위한 사랑과 희생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뒤늦게나마 용기 내어

아버지께 말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주희/경기도 안양시-

 

굿모닝~!!!!

지금은 어디를 가든지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저의 어린 시절은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

습니다. 40을 갓 넘어서 남편을 여의고 일곱 남매의 학업과 생활을 떠맡은 어머니, 남자 형제 없는

저는 말상대가 없어 그림을 그리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친구들도 별로 없다보니 학교를 파하면 곧장 집에 와서 라디오를 듣거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은

내 벗이었고 외로움의 돌파구였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 속에 빠져들어 무인도에 멋진 집을 짓기도 하고 혼자서 1인극을 하기도 했습

니다. 안방에 있던 다락방은 저 혼자만의 왕국이었습니다.

사업에 바빴던 아버지는 저와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에 소홀했냐 하면

그렇진 않습니다. 사업 때문에 늦게 들어오더라도 사탕봉지를 사들고 와선 잠자는 우리들 머리맡에

놓기도 하고 일찍 들어오는 날은 장을 봐가지고 오시기도 했습니다. 1960 년쯤에 전화가 있었던

우리 집은 동네에서는 부자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집에 전화가 걸려 와서 받았더니 “진우냐?”(어렸을 때 아버지가

작명가에게서 받은 제 이름)하며 아버지가 물었는데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저는 아들하고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이야기

를 해준 기억도 없고 가족여행을 간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아빠로서는 빵점짜리입니다. 변명하자면 그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장가갈 때의 나이도 지난 아들이 혼사 얘기가 솔솔 피어납니다.

아버지는 무심한 척해도 가족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언젠가 아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제가 없을 때 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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