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혁/Moody
Bible Institute 교수 “찬양과 문화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에 대한 질문은 올바른 찬양을 드리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도 같다. 구별되고 순수한 찬양의 재료를 위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찬양을 드리기 위해 찬양과 문화와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번 연재를 통해서 함께 고민해 고자 한다. 가역반응(reversible
reaction) 이란 원래 화학
용어로써 화학반응에서 반응물질로부터 생성물질이 생기기도 하지만 또한 그 생성물질로부터도 본래의 반응물질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반응을 가리킨다. 반응물질과 생성물질 사이에 서로 교류가
있다는 말이다. 산소(O2)와 오존(O3)을 예로 들 수 있다. 비슷한 개념으로 공생(symbiosis)을 들 수 있겠는데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서로 유익을 주며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몸
속에서 음식물을 분해해 주는 박테리아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은 박테리아 덕에 음식물이 분해되어
소화가 되고 박테리아는 자신이 살아갈 먹이를 그 음식물로부터 얻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조금 달리 이해를 하면 개념(concept)과
적용(application)
의 상관관계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의자를 예로 들어보. 인체의 구조가 앉으면 편해지므로 앉을 수 있는 물건(의자)에 대한 요구가 있으면 그것이 의자에 대한 개념으로 이해가 되고, 나무 둥지든,
안락의자이든 그 물건이 의자로써 역할을 하게 되면 그 물건은 의자라는 개념에 대한 적용이라고 이해를 할 수 있다.
개념을 통해서 실제 적용이 생기기도 하지만 실제 적용이 있기 때문에 개념이 보강되고 심지어는 새로 생기기도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18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이 일어날 무렵, 중산층의 성장으로 활발해진
상업과 대량생산은 함께 호흡하는 관계가 되었다. 대량생산의 요구가 증기기관 등 기계산업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업으면서 산업의 발달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산업구조와 기계/과학기술의
두 영역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소위 가역반응의 모습을 보이며 발전하여 왔다.
찬양과 문화 사이에도 이러한 가역반응적 모습이 있지 않을까
질문해 볼 수 있다. 물론 찬양과 문화는 동등한 위치에서 간주될 수는 없다. 찬양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경배와 예배의 한 방법이지만 문화는 인간적 활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찬양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을 경배하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하는 순수한 종교성을 띄고 있는 반면, 문화는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것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 이루어진 복합적인 문명의 한 모습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문화는 기독교의 영향을 지닌 것도 포함하기도 하지만 상당한 부분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찬양은 음악이라는 재료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대립되는 두 가지 다른 영역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즉, 첫 번째 영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순수한 찬양음악이고,
두 번째 영역은 인간의 문화 속에 놓여진 포괄적인 음악, 그리고 그 음악을 형상화하는
재료들로 인해 구별되는 여러 음악의 스타일들이다. 두 번째 영역의 경우 클래식 음악이 될 수도 있고 대중음악이
될 수도 있다. 이 글에서 후자의 개념을 문화에 해당하는 의미로 쓰기로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문화의 재료들이 찬양을 위해 선택 되고
다듬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틀림없이 찬양을 원하시고, 찬양의 방법까지도 일러주셨는데 그렇다면 ‘찬양에만 적합한, 세상과 때묻지 않은 방법으로 드릴 수 있는 순수한 찬양음악은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이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찬양(praise)을 담고 있는 구절은 모두 316구절인데, 여기에서 찬양의 대상, 찬양 드리는 자의 자세와
함께 찬양의 방법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엔 나팔과 비파와 수금으로, 제금을 울리고 북치고 소고치고 장구 치며, 손뼉 치며 춤추며 찬양하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악기와
몸짓은 사실 세상 음악의 도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찬양의 재료나 스타일로 고민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불로 돌판에 새겨 주셨듯이 왜 찬양의 모델과 재료, 스타일들을 본보기로 보여주시지 않으셨을까?
조금 달리 질문하면 ‘세상 음악에 사용되는 재료와 구별된 찬양만을 위한 순수한 재료가
있을까?’ 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러한 재료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널려있는 세속적인 것에 얼룩진 재료들로 찬양을 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인가?’ 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이며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찬양이 있으며 예배하는 자는 이러한 찬양을 구별하여 올려드려야
한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이곳이 세상의 문화와 함께 흘러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속에서도 재료를 대하는 예배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 찬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재료들은 구별이 되고 구별된 그 재료들은 더 이상 속된 세상의 재료가 아니다. 핵심은 이 재료들을
대하는 자의 마음이요 그 목적인 것에 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허락된 재료들은 바로 하나님을 위한 재료요, 제물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세상의 재료들 그 자체는 다분히 중립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재료를 어떠한 목적으로 어떠한 자들이 운용하는 가에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자신과 세상을 위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찬양과 문화의 상관
관계에 대한 핵심 논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에 놓여진 재료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누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글에서는 어떠한 재료들이 찬양을 위해서
쓰여져 왔고, 그 재료들이 세상의 문화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지, 그 가역반응적인 상관관계를 시대적인 맥락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