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용의 큐티- 압살롬은 내 친구, 동료, 동역자

by 관리자 posted Jun 0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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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용 집사 / 베들레헴교회>

·         오늘의 말씀: 스스로 높아지면 떨어질 일밖에 없습니다 (사무엘하 18;1~5)

·         말씀 요약

다윗이 전열을 가다듬어 백성들 위에 천부장, 백부장을 세운다 백성들을 삼분의 일씩 나누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의 휘하에 둔다 백성들이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간구한다.한편 아비새와 잇대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라고 말한다.  

전쟁 중에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맞닥드리자 그는 도망하다가 상수리 나무에 머리가 걸려 붙잡히게 된다. 요압이 창을 가지고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요압의 부하들이 그를  죽인다.

·         내게 주신 말씀과 묵상: 9 

압살롬이 노새를 탓는데  노새가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에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탓던노새는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압살롬의 패배와 죽음 그는 성경에서 가장 희한하게 죽는다. 머리가 나무에 걸려  타고가던 노새에서 벗어나고 나무에 달려 있다가 요압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정황상 그의 머리카락이 나무 가지에 걸리고 엉켰다고 봐야할 것 이다.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다부터 정수리가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삼하14:26)  

성경은  장황하게  압살롬의 외모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오늘 그는 우수꽝스러운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한다

압살롬 그는 누구인가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삼하 18:18).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삼하 18:31-33).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가로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 (삼하 19:9,10,14).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밤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 3:1,6-8).

 

다윗을 죽이려고 까지 했고 가장 힘들이게 했으며 가슴 아프게 만들었던 그의 셋째 아들 그의 삶으로 칼이 다윗 집안에 그치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나의 장점이 삶에서 치명적 단점으로 나타날 때가 있는가?

 

·         구체적인 적용

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친화력있게 관계를 맺고 있지만 단칼에 싫어하는 것이 있다 거만함, 시건방짐, 무례함,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강압적인 태도, 탁상공론, 몸과 말의 불일치 이런 장면들은 사회에서는 안보면 그만이다. 상관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하지만, 공동체에서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공동체에서는 이런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이슈들이 불거지게 된다.  이런 경우  무조건 사랑의 마음으로 감싸라고 한다면 그건 나한테는 힘든 짐이다 관계란 것이 통하는 가운데 풀어야지 일방적인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나한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신앙의 노선이다 

문제는 이러한 것을 어떻게 풀어 나가냐에 달려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고 감정에 따라  모든 일이 달려있는 것 같다 일단 마음이 상하면 사람은 마음문을 곧 닫아 버리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가장 현명한 처세술이라면 적당한 거리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 그게 얼마만큼이란 말인가 아쉬운 만큼, 나의 역량이 되는 만큼 거기에서 멈출 때  관계는 더 오래 지속될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가능한 일인가 이렇게 되려면 자기 마음을 상대방에게 쉽게 보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사역도 적당 수준 이상으로 해서도 안된다. 공동체를 역동적으로 운동력있게  만들려면 나의 몸을 사려서는 안된다. 그건 차라리 조건부 만남의 관계가 되어 버릴수 있다 하지만 이것에서 배울 점이 있다. 나의 깊은 속을 쉽게 내놔서도 안되지만 그것을 상대방이 알수 없게 행동하여 자연스레 포장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배워야 할 세련된 인간 관계술이다.

공동체에서 부산을 떨고 지내왔던 지난 기간이 있었지만,  올해 부터는 나의 맡은 사역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몸조심(?) 중에  있다 이것 저것 눈에 보이고 필요한 것에 맞추어 개선하거나 고치며 만들어 가는 것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집중하여 그분의 인도하심과 선한 뜻에 초점을 맞추어 가는 것이 나에게 더 유용한 공동체 생활이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인간관계는 부족하고 한계가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하나님하고의  관계 속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바라보는 시각과 의견과 생각이 천차만별로 너무 다양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다 맞추기는 힘들다. 아무리 본질적인 것에 충실하고 따른다 해도 거기에 또 다른 이견과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인간관계가 가까우면  친밀성의 관계가 형성되고  의리를 따진다면  얼마나 거기에 걸맞는 신의를 지킬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속하지만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이 실효를 거두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때가 묻더라도 매일 주님 앞에 나가 세상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 (삼하 18:33)

주님께서 나를 위해 애통하고 눈물흘리시는 것 같다. 못났고 못된 나를 위해 매일 이렇게 주님께서 울고 계신 듯 하다 내가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금방 깨달아 진다 주님은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나를 위해  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난 것이다. 그것 뿐인가 죽어도 살겠고 앞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터 놓으셨던 것이다. 

주님은 편견이 없으시고  공평하시다 나는 예수를 받아 들이고 그를 나의 구주로 삼고나서 나의 모든 것이 그분한테 맞추어 지는 집중의 삶을 살게 되면서 부터 삶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선택 되어지는 정황속에서  내가 선택한 나의 운명이다 나는 자유의지도 예정설도 믿는다 나의 자유의지는 선하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무기를 사탄을 대적하고 나와 이웃을 지키기 위해  사용해야지 나의 욕망과 탐욕을 위해 사용한다면 나의 지난 삶처럼 허망한 모래성을 쌓게 된다 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삶이기 때문이다.

압살롬의 죽음을 통해 내가 가진 총력의 역량을 주를 위해 사용하는 자가 되야 겠다. 그것이 공동체 안팎에서 선하게 나타나는 나의 삶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기쁨의 삶이 되어야 한다.

 

·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늘 압살롬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겉 모습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주셨습니다 날로 새로와 지는 속사람의 강건을 간구합니다 믿음이 있기에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을 따라가기에 나의 삶은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삶의 그림자는 나의 믿음의 분량으로 나타납니다. 

주님 실천하는 영성의 삶이 되어지길 기도드립니다. 나의 코 끝이 아직도 호흡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주세요. 감사는 여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 주신 달란트를 교만함을 위해 사용하다가 세상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조롱받으며 최후를 맞이한 압살롬의  허망스런 죽음을 따르지 않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순교자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삶을 이루어 갈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 저의 삶이 되게해 주세요.

오늘도 주님의 말씀 속에 거하게 하시며 하루를 시작하게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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