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목사/시카고 나무교회 담임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1895~1960).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여섯 살 때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한번만 듣고,
그 자리에서 거의 그대로 연주하고 한 번 익힌 곡은 그 자리에서 마음대로 조를 옮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동안 진정한 천재라고 할 만한 사람을
세 명 만났다. 한 사람은 처칠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아인슈타인,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클라라 하스킬이었다.”
클라라는 어렸을 때 실력을 인정받아, 루마니아에서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파리 음악원에서 세계적인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에게 작곡과 이론을, 그리고 최고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5세의 나이로 파리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그녀는 단번에 모차르트 전문가로 인정받으면서 수 많은 연주회를 통해 명성을 떨쳤다.
독주뿐만 아니라 기악연주자와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많이 했다.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와
첼리스트들이 최고의 실력과 인품을 지닌 그녀와 함께 연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클라라는 18세에
불치의 병을 얻게되었다. ‘다발성 경화증’. 몸의 모든 신경과 근육들이
굳어져서 엉겨붙는 병이다. 그녀는 연주를 포기할 수 밖애 없었다. 연주는
커녕, 온몸에 보조기구를 찬 채 벽에 기대거나 누워있어야 했다. 병의
휴유증으로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갑자기 늙어버렸다. 순식간에 재능과 건강을 잃은 그녀에게 더 큰 불행이 찾아왔다.
자신의 최고 후원자인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그녀의 나이 23살. 1차 세계대전중에 클라라는 가족도 없이 침대에 누워 꽃다운 20대의 청춘을 보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그녀는 놀라운 의지로 병과 싸운 끝에,
불구의 몸을 일으켜 콘서트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태인이었던 그녀는 나찌를 피해 프랑스로 피신해야만 했다. 탈출과정에서 그녀는 또 쓰러지고
말았다. 원인은 뇌졸증. 게다가 뇌와 척수에 종양까지 발생해 목숨마져
위태로왔다. 다행히 그녀의 팬이었던 유태인 의사가 찾아와 수술끝에 그녀를 살려냈지만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러나 클라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쉰 살의 나이에 스위스 국적을 얻고 새롭게
출발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녹음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 음반들이 세계적인
명반이 되었다.
1960년,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콘서트가 열렸다. 피아니스트는 65세의 클라라 하스킬. 그 연주가 끝나고
얼마있지 않아 그녀는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가다 현기증을 일으켜 넘어지고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마지막 남긴말은, “그래도 손은 다치지 않았잖니!”였다. 하스킬은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타고난 것보다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늘이 내린 아픔을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로 승화스킨 클라라 하스킬. 그녀의 연주는 육신의 한계를 너머, 온갖 고통과 극단의 상황속에서 피워낸 결과였기에 더욱 값지고
아름답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건 찬란한 미래와 운이 아니라 현재의 어떤 고통과도 맞설 수 있는 용기와
포기하지 않는 힘이다. 그래, 스스로 외쳐보자. ‘난 고난이 싫어, 그러나 두렵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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