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길원 주필 / 언론인>
지난 6월 한달을 아이스하키 경기에 매료되어 지냈다. 옆집 러시아 출신 젊은이는 ‘굿 모닝’ 대신 요즈음
하키 경기가 없으니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넉살을 부린다.
시카고 블랙 혹스팀이
스탠리컵을 쟁취하고, 200만 명이 모여 우승을 축하하는 시민 환영대회가 끝난지도 벌써 두 주가 지났으나, 그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요즈음도 길거리를 가다보면 블랙 혹스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블랙 혹스 깃발을 달고 다니는 차량도 눈에 띈다. 라비니아 음악회나 보타닉가든 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이번 챔피언십의 MVP인 패트릭 케인의
88번과 팀 주장인 조너단 테이스의 19번 백넘버를 단 빨간 유니폼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된다. 병원에 갔더니, 통로 벽에다 여러 사람의 싸인을 받은
혹스의 대형 유니폼을 유리 박스에 장식해 걸어 놓은 것을 보았다.
사실 시카고는 상공업, 예술 문화 교육 도시 일뿐만 아니라 스포츠 도시이기도 하다. 컵스 야구팀이 1907- 1908년 우승을 한 이래 105년 동안 죽을 쑤고 있지만, 1900년대 초에는 1925년 시카고 소속이었던 카디날스의 우승을 합치면 3번이나 월드 시리즈의 챔피언 이었다. 하지만 화이트 삭스팀은
2005년 이만수가 블펜 코치로 있을 당시 우승을 한 바 있다. 베어스 풋볼팀은
사상 7번 우승을 했는데,
전설적인 플레이어 월터 페이튼이 뛸 당시인1985년 수퍼볼 챔피언쉽을
쟁취한 이래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시카고 스포츠의 위용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활약하던 불스팀의 6연승을 꼽을 수 있겠다. 불스팀은 1991년 부터 1998년까지
94년 95년을 빼고 내리 6번 챔피언에 등극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올해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시카고 블랙 혹스팀이 강적 보스턴 브루인스를
꺾고 스탠리컵을 따내서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혹스팀은 2010년에도 우승을 했고, 1934년, 1938년,
1961년 등 통산 5번 챔피언이 되었다.
스포츠 도시 시카고 위용 과시
아이스하키는 야구나
풋볼, 농구에 비해 덜 대중적 이다. 선수도 관중도 백인 일색이다. 나도 스포츠를 무척 좋아하는
층에 속하지만, 하키 경기는
동계올림픽 때나 어쩌다 구경하는 것이 고작 이었다. 그런데 스텐리컵
(Stanley cup) 챔피언십의 서부와 동부의 챔피언을 결정하는 ‘플레이어프’
컨퍼런스나, 여기서 이기고 올라온 동서 양 지역 챔피언이 맞붙는 ‘파이널’ 게임은 이야기가
다르다. 입장권을 구입 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입석도 천 달러를 주어야 살 수 있다. TV를 통해 보는 시청자도 풋볼이나 야구 못지 않게 엄청나게
많다. 혹스팀의 승리를 축하하는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열린 세레모니에 200만 명이 운집한 것만 보아도, 올해 아이스하키에 대한 일반의 엄청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무엇이 200만 명을 한 광장에 모이게 했는가? 우선 경기가 너무 재미 있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혈투다. 빠른 속도의 박진감은 손에 땀을 쥐게 했으며,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을 자아내게 했다. 조그마한 퍼크(Puck)를 사이에 두고 사나이들의 불꽃 튀는 육박전은 통쾌하다.
유나이티드 센터서 게임 관전
현장에서 직접 관전하는
맛은 더 기가 막히고 실감이 난다. 나는 미프로 풋볼리그(
NFL) TV방송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는 아들 덕분에
6월 2일 블랙 혹스와 로스엔젤리스 킹스가 맡붙은 플레이어프 3차전을 유나이테드 센터에서 식구들과 함께 보고왔다. 시카고는 결국 LA를 꺾고 파이날에 진출, 보스톤과 7전 4선승의 결승전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22일 시카고에서 마지막 경기 5차전을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볼 수 있는 행운을 또 가졌다. 1차전: 시카고(승) 4점 보스톤3점, 2차전: 보스톤(승) 2점 시카고1점, 3차전: 보스톤(승)2점 시카고 0점, 4차전: 시카고(승)6점 보스턴5점, 5차전:시카고(승)3점 보스턴1점, 6차전:시카고(승)3점 보스턴2점.
이중에 소리 소리 지르며
열광했던 경기는 1차전, 4차전, 6차전이다. 일진일퇴의 1차전은 세번의 연장전 끝에 자정을
넘긴 이틀만에 시카고가 4대3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드라마틱한 경기였다. 4차전은 5대5의 난타전을 벌린 후 연장 1피리어드 10분 만에 시카고가 6대5로 승리했다. 또 시리즈 3대2 상태에서 6차전은 보스턴이
이길 경우 3대3이 되니까 7차전
결승을 시카고에서 할 판이었는데, 시카고가 이겨 적진에서 스탠리컵 시상식을 했다. 트리뷴지는 특집 호외에서 “ No
matter, This is hockey. You breathe ,You play.---amazing , shocking, magnificent
17 seconds that won a Stanley Cup. Forever, you are going to remember forever.
What a game, what an ending, what a season, Seventeen seconds, enough for a
lifetime.”---이라고 썼다.
17초가
운명을 가른 것이다. 6차전은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안고 배수의 진을 친 보스턴의 사생 결단의 싸움이었다.
첫 피리어드 20분은 보스턴이 압도하는
일방적인 경기였다. 한 순간 보스턴 슛20개 육박에 시카고는
5개 뿐이었다. 선제골을 얻은 보스톤은 1-2점을 더 넣을 수 있는 찬스를 이때 불운하게 놓쳤다. 게임 종료 3분을 남겨 놓고 스코어는 보스턴 2점 시카고 1점으로,
보스턴의 승리가 점쳐졌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 못한 기적이 발생했다. 76초(1분 16초)를 남겨 놓고 혹스의 브라이언 비켈이
1점을 넣어 스코어는 동점이 되었다. 이제는 연장전으로 가게되었구나 라고 생각하기 시작한지 17초만에 데이브 볼랜드가 또 한점을 넣었다. 보스턴 응원석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이제 보스턴의 운명을 가를 시간은 단지 58.3초 남았다. 작전 타임을 가진 보스턴은 골리(goalie)까지 동원, 총공세를 폈지만, 운명의 신은 골 대신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경기도 있단 말인가? 아마 내 생전에 한국이 월드컵 축구 4강 까지 간 2002년과 함께 평생 잊지 못할 이벤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 퍼레이드 대회에 참가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 선수들 중에는 돈에 팔려 다른 팀으로 이적 될 수도 있겠으나, 나는 내 고장을 위해 열심히 뛴 혹스팀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한
시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다운타운에 내려갔다. 왕복 5달러
기차는 만원이 였고, 임시 증편까지 했으나, 일부 노선은 입석도 모자랄
만큼 너무 붐벼 몇 시간을 유니온 스테이션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선수들이 타고 간 이층버스의 루트를 따라 워싱턴, 미시간, 렌돌프, 콜럼버스 드라이브 길을 걸었다. 유니온 스테이션,
밀레니엄팍, 그랜트 팍은 물론 다운타운 전체가 철시된 채 온통 빨간색으로 점령 당했다.
200만 인파는 실로 장관이었다. 마침 방학 중이라 학생들이 많이 나왔다.
부모를 따라 나온 어린애들도 있었다. 나 처럼 나이 많은 어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과 ‘하이 화이브’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홈 메이드 가짜 스탠리컵을 들어 올리기도 하면서 젊은이들과
어울렸다. 딴 세상에서 사람에 취해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귀가길
기차 역 구내 식당서 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나의 이 천진무구한 ‘헝그리 스피릿’ ‘크레이지 하트’와 기자적인 열정이 식는
날, 내 붓도 식는 날 이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