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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마 병원(오른쪽에서 두번 째가 윤기철 선교사)


나를 보내소서


윤기철 장로는 65세에 개인 사업과 교회 장로 직을 내려놓고 아프리카 케냐의 맛사이 족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 후에 안락을 위해 여행을 가거나 취미활동을 하는 것과는 전혀 상반된 생각이었다.

그는 17 되던 육이오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단신 월남했다.

당시 13 이었던 동생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아버지를 '아버지 동무'라고 부른 것에 이념적 갈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육이오 전쟁은 윤장로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계기가 되었다.

1950 후반 교회학교 교사로 북을 들고 찬송하면서 노방전도를 하던 청소년을 위한 간증설교를 하였는데 간증을 들은

항서교회 김목사님이 신학공부를 하라고 권면하셨지만 피난 온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망설이다가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80년에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되었을 교단의 총회선교부의 총무였던 양신석 목사가 "미국에 가서 선교의 뜻을 이루기 바란다." 격려의

편지를 주었는데 미국에서 현실에 부딪히며 눈코 없이 바쁘게 살면서도 편지 내용은 마음 속에 살아 있었다.

한인연합장로교회 선교사역장으로 섬기면서 멕시코, 아프리카 지역에 번의 단기 선교를 다녀오면서 선교에 대한 꿈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다녀 선교지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맛사이 부족이 살고 있는 황량한 벌판과 갈라진 광야, 가축에게 먹일 물을 찾아 방황하는 지친 유목민들이

마음에 걸렸다.

가난에 찌들고 영적으로 피폐한 소망 없는 맛시이 부족이 눈에 아른거렸다. 잊으려고 애를 써도 맛사이 부족의 퀭한 눈과 말라버린 , 전기불도

없는 그들의 초라한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2000 1025 이른 새벽 하나님께서 윤장로를 깨우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것이라. 보라 내가 일을 행하리라."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였다.

그로부터 1 뒤인 2001 95일에 케냐의 맛사이 부족을 섬기려고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선교사역을 하면서 세상을 바꿀 있는 동력이

교육이라는 점을 깨닫고 학교 채플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사람과 봉사정신이 투철한 인격자를 길러내기 위해 '렐레' 지역에 기독학교 채플을 건축하였다.

하나님 나라 확장사역에 가장 가치있는 투자가 어린이에게 투자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선교사역에 깊은 강명을 받았는데 슈바이처는 기도 중에 이런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30 까지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이후의 삶은 이웃을 위하여 헌신한다."

그는 6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선교사가 되었지만 선교에 대해 준비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무명의 갈릴리 어부들을 불러 땅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 주님임을 믿고 부르신 하나님께 순종만 한다면 선교사역을

감당케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기도 중에 맛사이 부족을 어떻게 섬길까 하는 묵상을 하면서 농업적 접근을 하면 좋겠다는 비전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윤장로는 농사를 지어 적도, 농업분야에 관여해 사실도 없었다. 더군다나 맛사이 부족은 농사를 짓는 족속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육류가 주식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맛사이 부족에게 농업선교


케냐 정부에서는 맛사이 족에게 땅을 분배했기 때문에 제한된 공간 속에서 유목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유일한 자구책은 반유목 즉 반은 유목을 하되 반은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맛사이 부족은 물질적인 궁핌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도 피폐해 있었다. 전통문화와 인습 그리고 토속신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 정부에서 분배해 준 땅에서 정착하여 살려면 가축도 기르고 농사도 하는 반유목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때에 농군학교 설립은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 농업세미나를 열어서 영농법을 가르치고

시범농장에서 배우고 실습하면서 인근에 있는 농장을 견학하게 하였다. 시범농장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을 보면서 농사일에 친근감이나 호기심이 생기면 그들도 직접 농사를 지어볼 마음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다. 해볼까 말까 망설일 " 수 있다." 가능성을 제시해 주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격려했다.

처음 하는 것을 몸에 익히기 까지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생기는 것은 각오해야한다,

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뼈를 깎는 아픔과 피나는 땀을 흘려야 황무지를 옥토로 일구어 있다.


모래 사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고백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농군학교 건물을 건축하면서 아침에 강변에 있는 모래를 실어오기 위해 트럭이

현장으로 갔다. 그런데 빈 트럭으로 돌아왔다. 사연인즉 현지 청년 10여명이 몰려와서 이 강의 모래는 "커뮤니티에서 관리한다."며 모래를 실어가지 못하게 해서 옥신각신 하다가 모래를 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잠시 후 모래를 싣지 못하게 한 청년들이 공사현장으로 몰려왔다. 그들에게 "왜 빈차로 돌아오게 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청년들이 강의 모래는 커뮤니티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모래를 관리하는 일은 자기들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큰소리로 "모래는 법적으로 우리 농군학교 소유인데 방해하지 말라."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에 이상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때 윤장로는 담대한 마음으로 스텝들에게 방가(참수할 때 쓰는 칼보다 조금 작은 칼)을 가져 오라고 했다. 그들은 칼을 가져올 생각은 하지 않고 윤장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 큰소리로 빨리 칼을 가져 오라고 외쳤더니 어쩔 수 없이 칼을 가져왔다. 윤장로는 방가를 들고 모래 운반을 방해하는 지역청년들에게 강으로 가자고 했다. 그들에게 "농군학교 사역은 커뮤니티 사업인데 우리의 일을 돕지는 못 할 망정 왜 사사건건 방해하느냐? 너희가 이전 선교사는 추방했지만 나는 못 간다. 차라리 이 방가로 나를 죽여라. 나는 죽으면 가지만 살아서는 못 간다." 라며 소리쳤다.

그리고 너희 리더가 누구냐? 당장 나오라고 했더니 명이 다가왔다. 나는 그들에게 방가를 건네고 자리에 무릎을 꿇고 목을 숙이면서 "너희들이 진정 내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칼로 목을 치라." 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청년이 "엘다(장로님)"하면서 팔을 붙잡으며 "엘다, 쏘리(장로님 미안합니다.)" 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의 청년들과 스텝들 그리고 공사장 기술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윤장로는 청년들에게 다시 물었다. "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가?" 했더니

"엘다, 헝그리! 엘다, 헝그리!" 하였다.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숙연해지며 눈물이 돌았다. 나는 그들을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배가 고프면 내게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될 것을 어찌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가?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후부터 청년들은 사람씩 와서 교대로 모래 싣는 일을 하게 되었다. 모래 작업이 끝난 청년 리더를 불러서 염소 마리 값을 주며 회식하라고 했더니 어쩔 몰라 하며 좋아했다. 그리고 후에는 우리의 일터를 오가며 인사를 나누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선교사역 헌납과 새로운 사역


정이 들대로 들고 눈물로 이루어 놓은10년간의 결과물인 농군학교, 교회사역, 의료(병원) 사역 피땀 흘려 가꾼 전재산을 AIC교단에 기증하고 앞으로 지속될 사역의 내용을 정리해서 교단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할 있도록 조치하고는 새로운 마음으로 케냐의 북서부 지역키탈레에서 2 사역을 시작했다. 키탈레는 영적인 아들 완야마 목사의 고향이다. 완야마 목사는 맛사이 부족이 아니어서 갖은 모략과 누명으로 맛사이 지역에서는 아상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키탈레 지역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 5 에이커의 땅에 가나안 비전센터를 세웠다. 가나안 비전센터에는 비전교회, 성경학교, 목회자 평신도 양육과 훈련원 사역에 중점을 두고 건축했는데 2012 121일에 1,200 명의 하객과 감격의 헌당예배를 드렸다.


윤기철 장로의 신앙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인간중심의 삶에는 간교함이 뒤따르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없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갈 때만 인간은 소망을 지닐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살며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살아갈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신다. 시기심 때문에 남을 모함하고 비방하며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묘혈을 파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있다. 화해와 용서의 마음을 가진 자만이 이웃과 더불어 화목할 있다. 시기, 질투, 모함 등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 사탄의 도구로 사는 삶일 뿐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설혹 교회 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를 파괴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없다.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의 배후에는 사탄의 세력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선교지에서 시기와 질투로 교회를 비방하며 이단이라고 헛소문을 냈다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들의 속에도 주님이 찾아와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거룩한 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 그릇들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선교 후원자의 간증


윤기철 장로는 육이오로 월남 홀홀단신으로 세상을 헤쳐 가며 하나님을 섬겨 왔다. 가족이 없으므로 누구에게도 못할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그리고 인생의 후반을 선교에 대한 부담을 주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아프리카 케냐로 날아갔다. 영국의 지배 하에서도 당당하게 맞서 왔던 용사 맛사이 부족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자립의 길을 마련한 것은 획기적이었다. 선교사역을 후원하는 어느 분은 이렇게 간증했다.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은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에서 내가 드린 헌금을 통해 그리스도께 돌아온 사람을 만나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모든 일은 미쳐야 한다. 인간적인 계산이 앞선다면나님의 일은 없다.


이태영 기자 skyvoice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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