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애나
퍼듀대학의 한국유학생이 학교서점 건물 앞에 서 있다가 부주의하게 운전하던 트럭에 치여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인 운전자는 경찰에게 티켓을 받아 얼마후 법원에
나가 약간의 벌금을 낸 것이 끝이었고 사후처리는 보험에 의해 마무리되었습니다. 장례를 위해 한국에서 건너온
부모님은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냐고 분통을 터트립니다.
고의로
사람을 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과실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는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유사한 경우에 한국도 이제는 종합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면 미국과 마찬가지로 구속을 원칙으로 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형법상 과실치사와 교통처리특례법에
의해 상대적으로 큰 책임을 묻게 되어 있습니다. 이부분을 이해하려면 여기서 법철학이 등장합니다.
사회적으로
불미스런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손해배상 같은 민사문제로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형벌을 부과하게 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인류의 역사는 권력에 의해 형벌이 늘 남용된 기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근대형법은 형벌의 근거를, 결과 자체가 아니라, 나쁜 결과를 가져오려고
한 의도, 즉 고의(intent)가 있는 경우에만 벌하는 것으로 줄여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고의가 아닌 과실에 의해 발생한 불미스런 결과에 책임을 부과하는 과실치사죄는 구시대의
범죄라는 것이 법학의 주류견해입니다.
독일형법을
수입한 한국형법에는 과실치사죄가 아직 범죄목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에 반해 비교적 진보적인 영미법국가 미국은 형벌은 고의가 있어야만 부과한다는 이념이 더 확고하여 과실치사죄라는 것이
범죄목록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법학의 차이는 일반인의 인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혹시
지난 2002년 한인여중생
2명이 훈련중인 미군장갑차에 의해 치여 사망했던 사건을 떠올리는 분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적 정서에서는 과실치사인데 구속수사도 없이 아무런 형벌을 주지 않은 당시의 결정에 분개할 수 밖에 없었지만, 미국적 상식에서는 그 미군들이 고의로 사고를 냈을 확률은 거의 없으니 오히려 형사적인 책임을 묻자는 것이 더 이상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물론 한미행정협정의 불공평성 등 다른 이슈가 섞인 것이었지만 그 이후 벌어진 강력한 반미운동을 생각해 보면 과실치사에
대한 법적인 문화의 차이가 필요이상의 오해를 가져온 측면도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도
주류견해에 따라 현재는 과실치사관련범죄를 가능한 폐지하거나 그 형벌을 완화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현재 교통사범의 구속은 중대사건의
경우 뿐이고 합의를 종용하기 위한 강제수단 정도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즉 유족에 대한 보상을 구속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압박하고 있는 거죠. 사망사고라 하여도 합의하면 1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사회도 우리와는 정반대 방향의 고민을 합니다.
결과가 치명적이고 중대한 과실이 있는데도 형사적인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사회의 보호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론상 고의를 몇가지로 세분해서 우리 개념상 중과실에 해당하는 정도를 고의로 편입시켜 책임을 지게 합니다.
결과가 아니라 고의에 대해 문제삼는다는 이 대원칙은 형사법 뿐 아니라 미국사회를 이해하는 열쇠 중의 하나입니다. 비싼 변호사를 써서 뜻밖의 소송결과를 냈다면 대개 고의가 없었음을 솜씨좋게 입증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미국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플로리다의 짐머만케이스 평결도 결국은 검찰이 청구한 2급살인죄의 고의를 입증하느냐 정당방위로 막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결국 무죄를 받고나니 흑인청년의 죽음이라는 참혹한 결과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다시한번 법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법철학적인 얘기를 조금 드려봤습니다. 법학은 딱딱해 보여도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영역인지라 관심있게 들여다보면 꽤 흥미롭습니다.
김영언 변호사
(법무법인 미래) 847-297-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