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배 목사 / 아가페침례교회>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계2:12) 상기에 나오는 지명 버가모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타난 일곱 교회는 사도 요한 당시 실재 했을 뿐 아니라 모든 세대의 교회에 대한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약 104km 내륙 도시로, 이스탄불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버스로 9시간이 소요 된다. 파피루스와 도서관이 유명한
문화 도시이다. 버가모는 로마 시대의 페르가뭄 (Pergamum) 왕국이 있었던 곳이다.
버가모의 오늘날의 명칭은 베르가마 (Bergama)이다. 베르가마는 알렉산더 대왕의 유산을 이은 페르가몬 왕국의 장대한
유적이 우뚝 솟아 있는 도시이다. 베르가마는 비옥한 들판에 위치한 아담하고 평온한 도시이다.
이곳 최고의 명소는 북쪽의 언덕에 우뚝 서 있는 페르가몬 왕국의 유산인 아클로폴리스이지만 로마의 의료 시설인 아스클레피온과 거대한 신전 건축, 크즐 아블루도 볼 가치가 있다. 도시 주민들은 대거로 몰려오는 관광객을 곁눈질로 보기만 할
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무심한 태도 역시 여행의 추억으로 남는다. 인구는5만2천명, 해발 고도는 103m이다. 페르가뭄의 역사의 중심지는 셀리누스 강가의 비옥한 평야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부터
많은 문명인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리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점령 당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장군 중의 한 명이었던 리시마쿠스가 페르가뭄과 애게해의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했다. 리시마쿠스가 죽은 후, 이 곳은 필레타이로스 하에서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탈로스와 유메네스 왕이 다스릴 때에 이 페르가뭄은 모든 서부 아나톨리아를 통치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황제였던 아탈루스 3세의 유언에 따라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이 곳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도시는 3세기 말까지 황금 시대를 누렸다. 특히 양피지가 이 곳에서 발명된 이후로 이십만 권이 넘는 책자를 소장한 도서관이 세워지면서 페르가뭄은 알렉산드리아 같이 로마 제국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페르가뭄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로 지역적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잠깐 동안이나마 한때 유대인들이 거류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이곳은 교회로 전환 되었고 성 바울에게 봉헌되었다. 신전에 속한 탑 중의 하나가 유대인들에 의해 회당으로
사용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사진설명> 이 커다란 신전은 2세기에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위해 붉은 벽돌로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