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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 한인 이민 초기에 YMCA 사업으로 많은 시카고 한인에게 도움을 주었던 시카고 한인 YMCA의 총무, 이창식 장로가 39년동안 제2의 고향으로 몸담아 살았던 시카고를 떠나 자녀들이 있는 L.A.로 가셨다. 평생을 YMCA에 헌신하여 시카고 한인 YMCA가 이창식 그 자체였던 이창식 장로가 떠나시는 날, 지난달 29일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YMCA와 장로님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이제 시카고를 마지막으로 떠난다는 감정에 복받쳤는지, 장로님은 그동안 안보였던 눈물을 흘리시며 시카고와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전쟁 중 고아사업: 황광은 목사와의 운명적 만남


9.28  서울 수복 후 종로국민학교에서 중앙아동보호소라는 이름으로 적십자사, YMCA, YWCA, 개신교, 천주교 수녀들이 아동들을 모아 씻기고 옷 입히고 식사 봉사하던 중,  교육담당 부장이었던 박윤삼 목사 (당시 숭의여고 교목)를 만나게 되고, 그의 기독교 교육과 레크레이션 지도를 보며 어린이의 정서교육에 훌륭한 방법임을 느껴 앞으로 레크리에이션 수업과 지도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후 1.4 후퇴 작전으로 서울중앙보호소 아동들이 제주도로 이송되어 한국보육원이란 이름으로 아동들을 돌보게 되었다. 이때 황광은 목사가 교육담당 부서의 책임자로 부임하였는데 아이들을 절대로 체벌로가 아닌 사랑의 언어로 훈육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인격에 감동받아 이후 황광은 목사를 인생의 선배로, 멘토로, 롤모델로 깊이 존경하며 동역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의Franagan 신부의 Boys’ Town의 모범을 실현하여 한국에 Boys’ Town을 설립하려는 황목사의 비젼에 공감하게 되었다. 부모없이 자란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 체제를 아이들에게 자활정신을 키워주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채용한 훈육으로 소년들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보이스타운에서는 시장 선거로부터 시작하여 소년신문사, 소년군 조직, 시의회 의원 선거, 노동국을 설치하고, 시 은행과 병원 등 필요한 시설을 두고 각처에 아동의 책임자를 두고 그들이 직접 운영토록 지도했다. 소년군은 보이스카웃 조직을 이용하여 보이스카웃 훈련을 겸했다. 어린이들의 근로정신을 키우기 위하여 소년군, 은행, 신문사, 농사, 목공소 등 작업을 하게 하고 일한 만큼의 임금을 지급하고 가진 만큼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여 생활하도록 하였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은 제공되고 있었지만 더 나은 것은 자신의 힘으로 번 돈으로 구입하여 생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제주도 생활이 안정되어 부산에 있던 어머니와 동생 미자도 제주도로 데려와 함께 생활하며 일시 행복한 제주도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다.

황광은 목사는 함께 동역하였던 김유선 교사와 결혼하고 부산으로 이동하여 잠시 황목사와 헤어지게 되었다. 서울 탈환 소식을 듣게 되고 전쟁이 호전된다는 소식, 그리고 갑작스레 서울에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러 제주도 생활을 접고 상경하게 되었다.

 

YMCA에서 일하기 시작

 

서울로 돌아온 후 그동안 황광은 목사로부터 듣고 있었던 종로의 YMCA로 당시 총무인 현동완 총무를 찾아갔다. 마침 황광은 목사가 와있어서 그날로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YMCA 건물은 아직 회복이 안된 상태이었고 그 별관을 무산아동학교로 사용하고 있었다. YMCA 사업은 무산 아동 삼동학교, 난지도 삼동 소년촌 등 전시 구제사업으로 직업교육, 체육사업 등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YMCA에 종사하기 위한 필수교육으로 부산에 있는 YMCA 칼리지에서 1년과정의 Y 간사가 되기 위한 실무자 훈련 과정도 받게 되었다. 특히 이때 배운 클럽 운영체제는 평생 Y 클럽운동을 지도하는 기본이 되었다.

Y 전문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다시 올라와서는 황광은 목사가 운영하는 난지도 소년촌에 합류하여 제주도에서의 Boys’ Town 생활이 다시 재현되었다. 난지도 소년촌은 날로 성황을 이루어 신문, 방송사에서 취재가 됨은 물론 각 대학 사회복지과의 교육, 연구자료가 되고 하기 캠프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 등 전후 사업으로서 성공적인 YMCA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한편 보이스카웃의 순수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단체로의 부흥운동이 시작되어 한국소년단   교도국장으로서 한미연합 잼보리 참관, 시찰, 전국지도자회, 강습회, 현역대장 강습, 중고등교사의 소년단 대장 훈련과정 등을 담당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던 동남아 보이스카웃 지도자 강습회에도 한인 최초로 참가하여 이후 한국 보이스카웃 운동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이후 서울 YMCAY 간사로 시무하고, 1년간 홍콩 YMCA 칼리지 훈련기간을 거쳐 YMCA의 교육부 업무를 맡고 와이스맨스 클럽을 창설하여 고려와이스맨스 클럽을 관리하게 된다. 특히 당시 부상하기 시작한 관광진흥책으로 YMCA의 호텔학교는 관광고급 종업원 재교육의 장이 되어 일본으로의 호텔견습과 연수, 호텔고급지도자 양성 과정 등이 활성화 되었다.

1971, 앞서 만났던 박윤삼 목사로부터의 영향, 그리고 그동안 해외에서의 강습회 등을 통한 교육으로 나름대로 레크리에이션 지도와 대중 무대 공연 등의 경험을 쌓게 되었고 레크리에이션의 이론과 실제를 체득하며 교과목의 지도방법도 창작하게 되어 이를 총 집대성하여 레크리에이션 : 재미있는 집단놀이 (265 p.)를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당시로서는 건전한 오락문화와 집단놀이, 여가놀이의 선구자격인 책이 되어, 각급학교의 필독서로 채택되고 대학특별강좌, 주일학교  교사하경회 등 초청강사로, 대학에 레크리에이션과가 신설되어 교수로서 강의하기도 하고, 이 학과를 통하여 우수한 오락지도자가 양성되어 건전한 한국 오락문화를 이끄는 선봉자가 되었다. 미국 이민 후에도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로 각종 행사에 초청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미국 시카고로; 그리고 시카고에서 한인 YMCA

 

1975, 이민으로 새 삶을 시작할 나이로는 늦은 나이, 45세에 시카고에 도착하였다. 이미 황광은 목사 가족이 와있는 시카고로, 그리고 시카고 한인 복음교회 (현 복음장로교회)에 자리를 잡았다. 복음교회에서는 시카고를 떠나는 마지막 주일까지 예배를 드리며, 이곳에서 부부가 장로, 권사로 임직되며 섬겼다. 이민 초기, 이창식 장로는 트루먼 칼리지에서 3년동안 Main Stream Project의 교수로서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6개월간 수료후 직업을 알선하는 일을 하게 된다. 많은 한인들이 이 프로그램으로 영어와 기술을 익혀 취업이 되도록 도와 보람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부터 해왔던 YMCA 사업은 시카고에서도 해야 했다. 다시 YMCA로 돌아왔다. 당시 클락길에 2층 셋방에 있던 시카고 한인 YMCA 이다. 이사회를 구성하고 회원모집운동을 실시했다. 모금운동으로 1979년 미국에서는 최초로 자체 건물을 소유한 한인 YMCA가 되었다. 현 시카고 한인 YMCA의 건물이 위치한 링컨길로 감격의 이사를 했다. ESL 강좌, 시민논단, 고교영어, 한글학교, 고교생 간담회, 스키 강습회, 수영반, 미술반, 기타반 등 당시 이민자들에게 필요한 강좌는 모조리 개최했다. 한글학교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한글교육, 고전무용, 태권도 강습 등, 그리고 Hi-Y 운동은 YMCA의 기본교육이기에 필수 요건이며, 그외에 여름방학 캠프, 데이케어 캠프, 자원봉사, 로렌스길 청소, 유스호스텔, 유학생 적응 상담, 마약교육 등 중요 사업을 실시했다.

시카고 한인 YMCA가 실시하였던 중요한 사업 중에는 무엇보다 우체국 학교를 꼽을 수 있다. 우체국 시험을 준비하는 일부터 취업을 위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유하는 프로그램으로 이를 통하여 많은 한인들이 우체국으로 취업, 진출하여 이민생활의 터를 잡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서울 YMCA와 연합하여 국제결혼 상담과 중매 프로그램으로 많은 한인 자녀들과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여 많은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1980년부터 이창식 장로와 함께 링컨길에서 자체 회관으로 시작된 시카고 한인 YMCA는 향후 2000년까지 시카고 한인 이민사회와 한인 이민자들에게 이민생활에 필요한 많은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쉽지 않은 타국에서의 이민생활로 지쳐 각박해진 이민자들에게 문화공간이 되어 주었다. 이후 시카고 지역에 다른 많은 문화센터라든가 사회복지기관이 생기면서, 그리고 이창식 총무가 은퇴하면서 YMCA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창식 장로처럼 헌신적이며 투철한 YMCA 정신으로 무장한 진정한 Y-Man을 영입하기가 어려워 실질적으로 더 이상 YMCA의 존속 자체가 어려워 지게 된다. 앞으로 시카고 한인 YMCAL.A. 나 뉴욕, 캐나다 토론토 등 다른 지역의 한인 YMCA의 운명처럼, 세대교체에 실패하여 문을 닫게 될지, 지금까지는 미주내 유일하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한인 YMCA로서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이창식 장로의 평생을 건 사명이자 희망인 한인 YMCA는 지금 풍전등화처럼 가물가물 그 슬픈 껍질을 남겨 두고 간 주인을 향해 길게 그 슬픈 목을 빼고 있다.    

 

 <사진설명> 첫번쨰 사진-장로님 시카고 떠나시는 날, 마지막 함께 식사: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문봉주 기자, 장로님 동생 미자 사모, 제부 박병로 목사, 이창식 장로, 장로님 사모님 이승연 권사



두번쨰 사진- 이창식 저, 레크리에이션 : 재미있는 집단 놀이 (대한기독교서회: 1971)


-- 이 기사는 10월 29일 떠나시는 날 인터뷰를 했으며, 이창식 장로님께서 틈틈이 써 놓으신 자서전 원고를 더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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