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 그 경솔함의 분노!

by skyvoice posted Sep 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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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배.jpg

<이형용 집사 / 베들레헴교회>

 

<오늘의 말씀> 약속에 대한 신실함을 기대하시는 하나님 (사사기 11:29-40)

<말씀 요약>

여호와의 영이 입다 에게 임하자 그는 암몬 자손들과 전쟁에 임합니다. 그는 나아가면서 여호와께 서원합니다. 주께서 암몬 자손을 이기게 하시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올 때에 내 집 문에서 나를 영접하는 무엇이나 물문하고 여호와께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과 싸워 크게 승리하여 암몬을 항복시킵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딸이 영접합니다. 두 달 동안 딸의 죽음에 대한 애곡기간이 있은 후 그는 딸을 자기가 서원한대로 여호와께 바칩니다.

 

<내게 주신 말씀과 묵상>: 31

“...... 누구든지 내 집문 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개정개역)

“......무엇이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한글 킹제임스)

“Then it shall be , that whatsoever cometh forth of the doors of my house to meet me, when I return in peace from the children of Ammon, shall surely be the LORDS, and I will offer it up for a burnt offering.” (KJV)

 

오늘 분문은 입다의 경솔한 서원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치른 전쟁의 승리가 묻히고 입다의 딸에 초점이 모아집니다. 입다의 서원은 여호와 앞에서의 딸의 번제입니다. 과연 여호와께서 입다의 서원을 받으셨을까요? 입다는 “whatsoever (무엇이든지)”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사람을 희생 제물로 드릴 생각은 애초 없었던 것을 보입니다. 또한 37절의 후반부는 영어 본문으로서 “weep because she would never marry (NASB), and bewail my virginity I and my fellows (KJV)” (virginity: 처녀임, 처녀성, 동정, 순결)

37절 후반부의 “나의 처녀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는 “나의 처녀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혹은 “나의 쳐녀됨으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로 번역해야 더 정확한 뜻이 됩니다.

이는 자신을 주님께 드림으로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일평생 동정의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애곡하는 것입니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18:21)

 

사람을 태워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런 헌물을 요구한 적도 받지도 않으십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 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 (8:11)

 

헌물로 바쳐진 레위 사람들은 주님의 것이 되어 주님을 위해 섬기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마 입다의 딸도 이렇게 하나님께 헌물로 바친 몸이 되어 시집을 가지 않고 처녀의 몸으로 일평생 회중의 성막에서 수종을 들며 하나님께 헌신했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나의 시간, 노력, , 능력, 재능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주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님께 드리는 것은 마음이 우선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입다처럼 어리석은 경솔한 서원은 그의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부터 나온 협상술입니다. 협상의 달인이었던 입다는 자기 힘을 과신했고 그래서 이런 비극적인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타협하려는 잘못된 시도입니다. 이와 같은 서원은 전혀 불필요 했던 것입니다.

입다와 같은 어리석음을 나는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적용>

일 일구 새벽백이!

풀어 쓴다면 119일 동안 새벽예배는 102!

지금 공동체에선 이 운동이 한창 진행 중에 있습니다. 매일 새벽예배에 30명이상의 교인들이 참석하고 토요일 새벽예배에는 50명 이상이 참석 중이라 합니다. 저는 새벽예배에 맨 앞줄 정도에 앉으므로 뒤를 볼 수 없고 또한 기도를 마치고 나갈 때쯤이면 두세 분 정도만 남아서 기도를 계속하시므로 누가 얼마나 참석했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필찬 교수의 요한계시록 수련회를 마치자 목사님께서 201398일부터 201414일까지 매일 새벽예배를 시작하셨습니다. 총기간이 119일간이고 새벽예배가 없는 주일날을 빼면 102일이 됩니다. 그래서 제목을 정하길 “일 일구 새벽백이” 가 되었습니다.

귀가 별로 좋지 않은 저는 처음에 이 계획이 선포되었을 때, 얼핏 새벽 대기란 말로 들렸습니다. 119는 긴급 상황이란 뜻이고 그러면 새벽예배에 경각심을 갖고 참석하라는 뜻인 줄 알았지, 알고 보니 매일 특별 새벽예배를 102일간 드린다는 것은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목 자체는 유치하게 들릴 수 있지만, 수사학의 대가이신 목사님다운 발상과 기발한 표현법으로 그분의 고심에 찬 계획과 뜻이 느껴지는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 장승백이란 곳이 연상됩니다. 장승은 마을이나 절의 입구, 또한 길가에 수호신이나 이정표로서 세우는 , 기둥과 같은 나무나 돌 윗부분에 사람 얼굴 모양을 새긴 상으로 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 등을 쓰거나 이수와 지명들을 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119일간의 새벽장승백이를 통해서 내 마음의 모든 우상들을 몰아내고 오직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영혼의 새벽 질주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기간을 통해서 주님이 온전히 나의 마음속에 임재하시는 틀을 마련하고 주님의 소통하심과 친밀하심의 통로로 세우심을 얻고 싶습니다.

짧은 새벽 예배 후에 드리는 교인들의 합심 기도는 간절한 외침과 부르짖음으로 전달되어 예배로 드리는 전체를 기도의 열기로 달구고 있습니다. 함께하는 공동체, 함께 드리는 예배와 기도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저절로 느껴지는 예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기간을 통해 공동체가 또 한 단계로 올라서고 개인적으로도 성큼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로 삼습니다.

며칠 동안 정식(?) 큐티를 할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06일까지 현 건물을 완전히 비워줘야 하므로 매일 물건 치우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새벽예배를 참석하므로 더욱 아침 시간이 줄어들어서 큐티를 글로 묵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예수 믿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고 또한 세상일에도 열심을 낼 수 있어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즐거운 비명의 삶입니다.

나에게 삶의 최우선의 순위를 정하려면 당연히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으며 기도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하고 무슨 소통이 있습니까? 이것이 없다면 성령 충만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관념적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죽은 신앙입니다.

성령 충만함 없이는 나를 지배할 수도 세상을 이길 수도 영적싸움에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전도는 커녕 나 하나도 제대로 지켜내기 힘들 것입니다. 나에게 말씀과 기도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은 오직 예수의 부르짖는 삶입니다.

 

<기도>

감사합니다. 주님.

삶이 분주할지라도 주님을 먼저 찾고 시작하는 하루가 되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과 기도가 나를 주님 안에 빠지게 하는 기쁨임을 알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또한 열정의 도가니로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힘의 원천임을 느끼게 하심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권을 주님의 주파수에 맞추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대사사 입다의 경솔함을 통해 주님의 말씀과 기도의 중요성이 나를 살리는 길임을 오늘 깨닫게 해주십니다.

사사기 큐티를 통해 옳은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지혜를 알게 하시고 여호와의 영광은 나를 통해 이룩하시고자 하는 작은 열매에서 시작됨을 알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