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역사 이야기 <2>: 뉴욕주의 이리운하 (Erie Canal)와 시카고 개발

by 관리자 posted Mar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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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 김광정 교수>

 

 “시카고역사 두 번째 컬럼의 주제로 가장 적합한 것은?” 하고 고민하다가, 일리노이 주정부로 하여금 시카고를 개발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인 이리운하 (Erie Canal)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였다이리운하가, 8년여의 어려운 공사를 마치고 드디어 공식 개통된 것은1825 10 26일 이다. 이리운하는 뉴욕주의 수도 알바니 (Albany, NY)에서 서쪽으로 330여 마일 떨어진 버팔로 (Buffalo, NY)를 연결한 운하이다시카고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뉴욕주의 동서를 연결한 이리운하가 어떻게 시카고 개발의 촉진제가 되었을까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듯 하여, 부연 설명을  하여 본다.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였던 뉴욕시에서 시작되는 허드슨강 (Hudson River)은 북쪽 알바니까지도 큰 선박이 왕래할 수 있게 수심이 깊었다. 자연히 뉴욕시에 모여드는 국내외의 무역선들은 자주 알바니까지 드나들면서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버팔로는 뉴욕 주 서쪽 끝 이리호수(Lake Erie) 옆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오대호의 하나인 이리호수는 크지는 않으나 뉴욕/펜실바니아/오하이오에 접하여 있고, 이리호수에서 휴론호수 (Lake Huron)를 거쳐 미시간호수까지 물길로 연결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리운하의 개통으로 가깝게는 뉴욕시 (멀게는 유럽)에서 이리운하와 이리호수를 통해 미시간호수까지 자유롭게 선박이 드나들수 있게 된 것이다.  1820년대 미국에는 철로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아, 선박운송이 가장 비용이 저렴하였다. 또한, 뉴욕과  중서부의 육로연결은 아팔라치안산맥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리운하로 인해 뉴욕/펜실바니아 주 북서지역과  미 중서부지역의 인구유입이 증가, 발전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이리운하의 경제 효능성은 충분히 짐작된다.  여하간; 이쯤되면,  이리운하와 시카고의 연결고리는  ‘물길’ (waterway)이라고 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면 동전의 한 면만 보는 격이 된다무슨 소리이리운하와 시카고 개발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미시시피강이라는 또 다른 물길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80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실제 영토는 대서양연안의 동부 해안지역에서 미시시피강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미국 경제의 두 큰 축은 뉴욕시와 미시시피강 남쪽 끝에 위치한 뉴올리안스(New Orleans)이었다. 뉴욕을 통해서는 주로 유럽의 공산품이, 뉴올리안스에서는 설탕같은 농산품이 미시시피강을 따라 중서부의 곡물들과 교역되고 있었다. 우리 다함께 이리운하가 개통된 1826년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첫 번쨰 상상: 승객/물품을 만재한 선박이 뉴욕시를 출발하여 허드슨강⇒이리 운하⇒이리호수⇒휴론 호수⇒미시간 호수에 들어오면 어느 방향으로 항해를 계속하게 될까?  우선 동남쪽으로 향하여미시간주 서부를 쭉 훝고 살짝 인디아나주를 거친 후에는, 방향키를 북쪽으로 돌려 일리노이/위스컨신주를 통해  다시 뉴욕시로 돌아가야 한다. 미시간호수 주위를 항해하는 동안, 얼마간이라도 정박을 할 수 있는 곳은 그린베이 (Green Bay, WI) 뿐이다.   

 

두 번째 상상: 뉴올리안스에서 설탕과 승객을 가득 태운 선박이 미시시피강을 북상하면서 교역을 한다. 미시시피강은 북쪽으로 올라가면서는  수심이 얕아진다다시 돌아 내려 오면서 위스컨신강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갈 시도를 하여 보지만 쉽지는 않다그러다가, 일리노이강을 따라 일리노이 내륙으로 들어와 보지만 역시 미시간 호수까지는 연결이 가능하지 않다. 당연히 뉴올리안스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잠깐! 뉴욕시에서 출발한 선박과 뉴올리안스에서 출발한 선박이 만날 수가 있다면, 그래서 뉴욕시와 뉴올리안스가 해상 루트로 연결되면, 미 전국경제의 활성화는 물론이고, 한 자역의 발전은  ‘따논 당상일텐데….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이러한 생각을 가장 발빠르게 행동에 옮긴 주정부가 일리노이 이었다물론그 당시에 일리노이 (1818)와 인디아나 (1816)는 이미 주 (state)로 조직되었고, 미시간 (1837)과 위스컨신 (1848)은 아직 territory였던 점도 있었지만,  미시시피강과 미시간 호수를 연결하는 최단 거리는 아무래도 시카고에서 일리노이강을 통해 미시시피강을 만나는 경로이다.  그리하여,  1829년 일리노이 주정부는 인구가 100 (납세자는 30) 미만이었던 시카고 개발을 결정하게 된다.  1829년 도면 작성을 지시하고, 1830년부터 시카고의 토지를 매각하기 시작한다그때의 이야기는 다음 컬럼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사족으로: 이 루트, ‘미시시피강일리노이강미시간 호수가 처음 발견되기는, 1673년 마르켓/졸리엣 탐험대에 의해서 이다당시 카나다 퀘백 지역을 장악하고있던 프랑스는 전설 (?)미시시피강을 찾아내어 미 내륙에 진출할 요량으로, 탐험대를 내보냈다. 이들은, 미시간 호수 북단에서 출발하여 아주 어렵게 북부 위스컨신의 작은 강들을 따라 서쪽으로 옮겨 가다가 드디어 미시시피강을 만난다쾌재를 부르며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쪽으로 알칸소강까지 내려갔다가, 그 이남은 이미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은 후  카나다 본부로 돌아가게 된다. 물결을 거슬러 미시시피강을 북상하는 것이 어찌나 힘든지 진척이 없는데, 아뿔사공동대장 마르켓 신부가 그만 중병에 걸리고 만다. 하루라도 빨리 본부로 돌아가야 하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찾은 지름길이 바로 미시시피강⇒일리노이강⇒데스플레인강⇒시카고강과 미시간 호수 이었던 것이다.  (이 탐험대의 경로가 지도에 빨간 줄로 표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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