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김광정 교수> 시카고역사 두번째 이야기에서 지적한 대로, 시카고는 이리운하 개통으로 꿈꿀 수 있게 된 뉴욕시와 뉴올리안스를 연결하는 ‘교역의 교차로’로 개발되었다. 혹시라도, 북대서양 연안의 뉴욕시와 미시시피강
남쪽 끝에 위치한 뉴올리안스의 연결이 왜 그리 중요하였나 하실 분이 계실 까 싶어, 19세기 초반의 미국을
아주 간단히 살펴본다. 그 당시 미국은, 유럽이민의 유입으로 인구가 급팽창하고 본격적인 산업화로 인구의 도시화가 가속되고 있었다. 도시에 모여사는 인구가 농산물을 자급자족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농산물과 생필용 공산품의 교역이 필요해 진다.
이렇게 농촌과 도시의 교역이 활발해지면 농업 자체가 자급자족이 아닌 마켓지향적
cash-crops농업으로 변하고 교역의 폭은 더욱 확대되어진다. 그리고, 주위지역에
국한되었던 교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전국 경제와 지역 경제의 발전은 뻔한 이치이다. 그 당시 미국 영토는 동부 대서양 연안에서 미시시피강에 근접한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뉴욕시와 뉴올리안스가 미
경제의 큰 두 축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미 내륙에서의 육로 운송은
도로의 미개발과 험한 산맥을 넘어야하는 관계로 비용이 많이 들어서, 해상 운송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시시피강과 미시간호수를 연결하는 해상 루트 개발의 필요성이 이해가 되어도, 여전히 “왜
시카고인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이에 한 마디로 대답하면 “미시간 호수에서 미시시피강을 해상으로 연결하는
최단 거리가 시카고에서 시작된다” 이다. 이러한 시카고의 지리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1829년도 시카고 인구는 100명 미만이었다고 한다. 왜일까? 연방정부가 1816년
재건한 디어본 성채 (Fort Dearborn)가 건재하고 있었는데도 백인들은 시카고를 피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 일리노이 주정부는
시카고 개발을 왜 1830년까지 기다렸던 것일까? 시카고 지역에 아메리칸 인디안들의 위협이 여전하지 않았을까
하실 분도 계시겠는데, 시카고 지역에서의 인디안 위협은 1820년 대가
되면 이미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 왜? 이를 이해하려면, 시카고의
지질학적 특성을 알아야 한다. 아시는
대로, 시카고는 미시간 호수에서 시카고강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시카고강 남북지류를 따라 발전하였다. 이 지역은 지질학적으로 좀 특이하다. 지도 (1)을 보자. 시카고강은 점선 (- - - -)의 동쪽에 위치하여 있고, 강물은 동쪽으로 흘러 미시간 호수로, 결국은 대서양으로 흘러간다. 반면에, 점선 서쪽에 위치한 데스플레인강과 일리노이강은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 미시시피강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점선 동쪽과 서쪽 사이에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 호수 시카고
Portage가 있다. 무슨 의미인가? 강물의 흐름이 반대 방향이어서, 미시간 호수 (시카고강)와 미시시피강은 자연적으로 연결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시카고강과 데스플레인강 (일리노이강)을 운하로
연결시켜야 한다. 1825년 10월 말에 개통된 이리운하는 일리노이 주정부에게 시카고Portage에 짧은 운하만 건설하면 뉴욕시와
뉴올리안스를 연결하는 해상 루트 개발이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드디어, 일리노이 주의회는 1829년 말 시카고 개발을 결의하고, 시카고 도면작성에 착수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의회는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특별위원회 (Illinois and
Michigan Canal Commission)을 설립하였고, 이 위원회에서 측량사
제임스 톰슨 (James Thompson)에게 시카고 지역 도면 작성을 지시한다. 이것이 잘 알려진 1830년 톰슨 도면이다 (지도 #2). 이때에 톰슨이 도면화한
지역은 지도 #3에 사각형으로 표시된 지역이다. 일리노이는 곧 이어
쿡 카운티를 만들어 시카고를 군청소재지 (county seat)로 지명, 운하건설 계획 발표와 함께 시카고 대지를 팔기 시작한다. 첫 번째의 토지매각은 1830년 9월
4일에 있었다고 한다. 이때의 토지매각은 순전히 도면에 따라 성사된 서류상의 매매이다.
그래서, 시카고의 시작을 real estate lottery로 부르기도 하는 데, 토지 매각에 얽힌 수 많은 에피소드는 다음 번 컬럼에서 다루겠다. 오늘은 1830년의
톰슨도면에 대해 조금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시카고는 크게는 시카고강을 따라 물 (water)과 뭍(land)이 나뉘지만, 동시에 도시 안에 (강 같지는 않더라도)
사람이 살기에는 힘든 습지가 아주 많았다. 그런데, 톰슨 도면을 보면, 시카고는 시카고강을 제외하면 모두 평평한 마른 땅인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평평하고 마른 땅이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똑 같은 크기의
126개의 집터 (lot)로 갈라져 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토지를 측량하지 않고도 쉽게 매각이 이루어져 빠른
기간에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는데, 재미있는 포인트는 이것이 톰슨이나 운하위원회의 사기성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1785년 대륙의회가 새로 개방되는 서부 지역의 토지를 쉽게 팔기 위하여 만든 토지조례
(Land Ordinance of 1785)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재정 (금전) 문제에
대한 아주 깊은 관심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