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김광정 교수> 지난번 시카고역사 세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1830년 일리노이 주정부가 미시간 호수와 일리노이강을
연결하는 운하, Illinois-Michigan Canal 건설 계획 발표와 함께 시카고 지역의 토지 매각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시장과 6명의 시의원이 취임하면서, 시카고가 시 (city)로
공식 출범된 것은 1837년 3월 4일의 일이고 당시 시카고 전 인구는 3,820명이었다. 1830년 9월
4일의 첫 번째 토지 매매와는 거의 7년의 간격이 있다. 운하 건설 발표와 함께 토지매각이 시작되면 곧장 시카고가 성장할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어찌하여 7년이나 걸렸나? 여하간에, 7년의 기간동안
시카고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궁금하여
몇 가지만 적어본다. 쿡 카운티 (Cook County)가 형성되고 시카고가 카운티
소재지로 지정된 것은 1831년. 1832년에 시카고강에 나무로 만든
다리 (bridge)가 놓여졌고, 1833년 시카고가 읍(town)으로 조직되던 해에 첫 번째 신문, ‘The Chicago Weekly Democrat’이
간행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시카고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은 데, 1833년 시카고가 읍으로 승격되었을 때 시카고 인구는 겨우
350명이었다고 한다. 무언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시카고 지역에서 토지매각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인가? 일리노이 주정부가 파는 시카고의 땅은 누가, 왜, 구입하였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살펴보면 시카고 시가 출범하는 과정이
보일 것 같다. 먼저,
가격부터 살피자. 톰슨 도면에 있는 126개의
집터 (lot) 의 1830년 공시 가격은 한 lot에 평균 $25-$35 이었다고 한다. 토지매매 상황을
보자. 1831년에 $80에 팔렸던 lot이1835년에는 $80,000에 매매가 되기도 하고,
1830년에 $62 하던 대지가 1836년에는
$96,700에 팔리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모리스 (Buckner Morris)는 시카고에서 땅을 사고 팔면서 100% 수익을 얻지 못하면 바보라는 기록을 남겼다. 시카고의 토지 판매 총액이 1832년에 2백4십만불이었는데, 1836년에는 2천5백만불로 뛰어오른다. 4년 만에 10배가 뛰었으니,
완전히 투기 (speculation)급이다. 이래서 시카고를 부동산 로또 (real
estate lottery)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지난 번에 살펴본 대로, 이 당시의 토지 매매는 순전히 서류상 매매이지 토지의
실제 경제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나, 1836년 시카고를 방문하였던 마르티노
(Harriet Martineau)가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 곳은 처음 본다”는 일기를 남긴 것을 보면 시카고에는 과열된 토지 투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4,000명 정도의 상주 인구가 있어야만 시 (city)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시카고에는
뜨거운 토지 매매가 있었는데도 상주 인구는 많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흠! 주정부가 발표한 운하 건설은 어떻게 되고 있었지?
토지에 투자한 이들이 시카고언은 아닌 것 같은 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떤 목적으로 시카고 땅을 구입하였지? 궁금증이 늘어만 간다. 참고로,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착공은 시카고강 남부 지류의 카날포트 --지금의 시카고의 브리지포트 지역--에서 1836년에야 있었고, 100마일도 안되는 운하건설이 12년이나 걸려서 1848년에 완공되었으니 운하는 접어두는 것이 적합할 듯 하여, 어떤 이들이 토지를 구매하였는가를
살펴보겠다. 이면에서,
시카고의 초대 시장인 윌리엄 옥덴 (William B. Ogden)의 스토리가 흥미롭다.
옥덴이 이리 운하/오대호 왕래 선박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시카고에 발을
디딘 것은, 시카고 인구가 3,200명이었던 1835년이다. 뉴욕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서른 살의 총각 옥덴이
시카고를 찾은 것은, 뉴욕주 정계의
실세였던 매부가 구입한 시카고 땅 3필지 때문이었다. “순전히 서류로 3개의
lot을 $100,000에 샀으니 옥덴, 네가
가서 땅을 살펴보고 다시 팔고 오라”는 부탁을 받고 왔다고 한다. 옥덴이 시카고에 도착하여 매부가 구입한 땅을 찾아가 보니,
무릎까지 빠지는 늪지였다. 옥덴이 누이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는 ‘매부가 완전히 속아서 산 것 같다.
여기까지 오느라 지불한 배삯이 아깝네!’ 이다. 그래도 이왕에 부탁을 받고 왔으니 시도는 해봐야겠다 싶어
물을 빼는 간단한 공사를 하고 땅 한 필지를 내놓았더니 금새 $100,000에 팔린다. 깜짝 놀란 옥덴이 눈여겨 살펴보니 시카고의 장래 전망이 밝게
느껴져서, 1836년 초 시카고로 영구 이주를 하고, 1837년 시장
선거에서 시카고 토박이 킨지 (John H. Kinzie)를 물리치고 초대 시카고 시장에 당선된다.
그렇다고, 시카고 시의 출범이 호황 가운데 이뤄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1836년 가을 180도 바뀐 잭슨 행정부의 금융정책으로 인해 1836년 말 부터 시카고 땅 값은 폭락하게 되고
파산 신청이 줄을 잇는다. 1837년
미 전국을 덮친 경제불황은 아주 극심하였는데, 1837년 시카고 토지 판매 총액이 1백만 불이었다고 하니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시카고는 철퇴를 맞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나마, 시카고에는
운하건설이 미미하지만 계속되고 있었고, 동부 뉴욕주 자산가들과 연결되어 있는 리드 그룹이 있어 극심한 경제
불황 중에도 시로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옥덴은 물론 이 그룹의 핵심 멤버이고 리더였었다.
그래서인지, 초기 시카고를 ‘옥덴의 시카고
(Ogden’s Chicago)’라고 부르기도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