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시카고’가 시작되기 5년 전
인 1843년도 시카고 다운타운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김 신, 김광정교수> 지금까지 우리는, 시카고 지역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기회가 시너지
(synergy)됨으로 시카고가 시작된 것을 보았다. 즉, 시카고는 상업도시로서 중서부의 주요 ‘교역 중심지’가
되리라는 기대 속에 1830년 9월4일 토지매각이 시작되었고, 1837년 3월
4일 시(city)로 승격되었던 것이다. 한 지역이 ‘교역의 센터’ 역할을 담당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 많은 것이 있겠지만,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1) 물품 운송 수단의 발달,
(2) 물품 보존과 분배 시스템의 발달, (3)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인구와, (4) 주민들의 원활한 생활을 위한 사회 구조/기반(infrastructure)
마련이 있다. 시카고는 언제쯤 이러한 필수 여건들을 어느 정도라도 구비하여 ‘교역의 교차로’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점에서 시카고
역사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해가 1848년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모던 시카고’는
1848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1848년 이라면 시카고시가 공식출범하고 10년이나 지난 시점인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싶어, 오늘은 시 승격 후의 10년 (1837-1847)간의 ‘초기 시카고’
의 모습을 살펴보아, 시카고의 생성은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기회’가 조합되어 이뤄졌지만,
발전은 개인의 이윤 추구에 바탕을 둔 사업가들의 역량과 비젼이 밑거름이 되었음을 보려고 한다. 앞서 시카고 역사<4>에서 언급한 대로; 잭슨
행정부의 금융정책 급선회에서 기인된 극심한 경제불황이 1836년 말/ 1837년 초부터 거의 5년간 미전국을 강타한다. 그리고,
시카고는 천정부지로 치솟던 땅 값이 하루 아침에 폭락하여 파산신청이 폭주하는 상황에서 공식 출범하였다. 공식 출범하자마자 바닥난 시의 재정을 보며, 여러 명의 리더들이 시카고 시정부의 파산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실제로, 1842-44년 일리노이 주정부의 파산으로 운하건설이
전면 중단된 일도 있었다. 만약 그때 시카고 시정부가 파산하였었다면, 시카고는 생기면서 곧 증발되어 ‘초기 시카고’는 물론
‘모던 시카고’도 없었을 것이다. 여하간에, 그 당시의 험난했던 경제상황은 아주 더딜 수 밖에 없었던 ‘초기 시카고’의 발전을 짐작하게 한다. 이미 허황된(?)
Big Dream의 고수로 알려졌던 주민들에게도 초기 시카고는 발전보다는 생존 그 자체가 이슈이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스미스 (Theophilus Smith) 일리노이 주 대법관이,
1836년 말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공사의 첫 삽을 뜨는 자리에서,
시카고 인구가 20년 후에는 2만명,
50년 후에는 5만명, 그리고 백 년 후에는
십만이 될 것이라고 하였더니, 관중들이 그에게 정신 차리라고 찬 물을 끼얹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184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인구는 교역 센터가 되기에는 역부족 상태이었다. 1837년 3월
3,820명 이었던 인구가 그해 (1837) 12월에는 4,140명이 되었고, 1839년 말에는 4,470명; 1843년
7,580명; 1844년 8,000명이 되는
데 그쳤으니까. 경제난과 함께 시작된 시카고는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개인 이윤 (personal profit)의 추구와 시카고 도시 확장
(urban expansion of Chicago)을 접목시킨 비지니스맨 그룹 (특별한 이름이 없어 ‘엘리트그룹’이라고 부른다)이 초기 시카고를 주도하였기에 가능하였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 엘리트그룹의 좌장이 초대시장
옥덴 (William B. Ogden)이다. 그는, 주민공청회에서는 시카고의 핑크빛 미래를 그 특유의 설득력있는 화술로 설파하여 비관론을 잠재웠고, 뉴욕주의 자본가들을 설득, 자본을 끌어 들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837년3월에서1838년1월 까지 단10개월 동안 시장으로 재임한 옥덴의 이름을 따서 초기 시카고를 ‘옥덴의 시카고’ (Ogden’s Chicago)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물론, 옥덴 혼자의 힘으로
한 것은 아니고, 엘리트 그룹이 함께 하였는데,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비지니스 협상과 시카고에 필요한 인프라 (infrastructure) 구축을 의논하고 결정하여 이들을 ‘shadow
city council’로 보기도 한다. 여하튼, 이 엘리트 그룹의 멤버가 되는 유일한 자격 조건은 ‘돈’- 얼마나 부자인가?-이었다고 하니, 이들의 개인적 부 (wealth)의 축적에 시카고가 이용 당한 것이 아닌 가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엘리트 그룹 --특히 옥덴을 중심으로 한 몇몇 리더들--의 시카고를 문화도시로 키우고자 하는 비젼이 돋보인다. 예를 들어, 이들은 러쉬의과대학의 터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하고, Chicago Historical Society,
Academy of Sciences, Chicago Musical Union등등에 깊이 관여하여, 경제적 면만 아니라 사회,정치, 문화, 교육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좀 더 정확히 지적하면, 초기 시카고의 엘리트들에게 시카고 발전은 개인이윤의 창출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명제가 작용하였던 것 같다. 초기 시카고의 어려웠던 경제난을 감안하면 이 점은 이해할
만도 하다. 결론적으로, 19세기 시카고는 규제되지 않은 시장 자본주의
(unregulated market-oriented capitalism)의 실험장이었으며, 초기 시카고 리더들의 이러한 성향이 ‘모던 시카고’의 방향을 결정한 점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림은, ‘모던시카고’가 시작되기 5년 전 인 1843년도 시카고 다운타운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어느 누가 불과 몇 년만 지나면 시카고가 미중서부의 진정한 교역의 교차로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것이라 상상할 수 있었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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