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김광정 교수> 시카고는1837년3월4일에 미 내륙에서 가장 활발한 ‘교역 센터’가 되리라는
기대 속에 공식 출범하였다. 그 몇 달전 (1836년말),
시카고 지역 토지매매의 빌미를 제공한 일리노이-미시간운하가 드디어 착공되어,
시카고가 변방의 한산한 촌락을 벗어나는구나 한 것도 잠깐, 곧 바로 들이닥친 매서운
경제불황이 시카고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3,820명으로 시작된 시카고 인구는 1840년까지 4,000명을 조금 넘고1844년이 되어서야
8,000명이 된다.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성장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경제불황? 그래도 운하공사가 계속되고 있지 않았던가? 여러 다른 의견들이 있으나, 오늘은, 교역 센터가 갖추어야 할 ‘물품운송수단’의 부족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 쉽게 말하여, 교역의 중심지는 타지에서 생산된 물품이 시카고로 운송되어
와서 이곳에서 매매가 이루어져서 타지로 분배되는 곳이다. 시카고에서 생산된 물품은 없었나? 물론 미미하게 있었으나 시카고의 제조업은 남북전쟁 전까지는
영아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시카고에서 거래되던 물품들은 어떻게 운송되어 왔을까? 우선, 뉴욕시를 중심으로 미 동북부에서는 이리운하/오대호를 잇는 물길로 인구와 공산품이 들어온다.
--사족으로: 미동부, 특히 뉴욕과
시카고의 단단한 연결고리를 잘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1850년 당시 시카고 주민의 대부분은 뉴욕,
펜실바니아, 커네티컷, 매사츄세츠와 버몬트주
출신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 중 가장 많은 곳이 뉴욕주이다.-- 그리고, 시카고와 뉴욕시가
해상으로 6일 이면 연결되어, 시카고에 들어온 공산품 가격이 대체로
낮았다. 그러면, 동부에서 들어 온 공산품들을 누가 구입하였을까?
물론 시카고 주민들, 그리고 시카고에 자신이 기른 농산품을 팔기 위해 모여든 일리노이
북부와 인디애나 북부의 농민들이 소비자이다. 그렇다면, 일리노이-인디애나 북부 지역의 농민들은 어떻게,
왜 시카고로 농산품을 팔러 왔는가? 이들은 웨건으로 농산물과 가축들을 시카고로 운송하였는데,
시카고가 시로 승격하고 10년이 지나도록 시카고로 향하는 시카고 주위의 하이웨이는
진흙 (mud) 투성이어서, 꽁꽁 언 겨울이나 여름 건기가 아니면 그나마
다니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비 오는 날이면 시카고의 상인들은
일찌감치 상점 문을 닫았을까? 1848년의 어느 상인의 일기에, “이렇게
비오는 날은,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시골에서 사람이 오질 않는다” 라고 써 있는 것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다니기 힘든데, 이들이 왜 시카고로 모여 들었는가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미국 사정을 조금 알 필요가 있다. 일리노이-인디애나의 토지는 농토로써는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옥하다. 자연히 농업이 자급자족의
수준에서 벗어나 마켓 중심이 된다. 이는, 한 지역의 농부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래 전에 개발이 시작되었던 동부에서 농업이 줄어들고 공업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미국 전국에서 동부는 공산품,
중부는 농산품으로 지역별 전문화가 이뤄지는 것이 느껴진다. 일리노이-인디애나에서 생산된 농산품들이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도로 사정이
아무리 험해도 농산물을 시카고로 가져 오려고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농산물 운송시스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시장 (market)을 급속하게 확대시킨 것이 1848년 4월16일에 개통된 일리노이-미시간 운하이다. 이 운하는 겨우 96마일을 뚫는데 장장 12년이 걸린 것도 기록이지만—참고로,
300마일이 넘는 이리 운하는 8년만에 완공되었다--, 일리노이 주정부의 파산으로 인한 공사 중단도 겪은 터여서 시카고에게는 아주 특별한 일이 되었다. 그 당시 연방하원 의원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이 운하 개통을
기념하는 연설을 연방국회에서 하였다. --링컨의 연방정치 경력에는 2년 간의 연방하원의원과 1860년 대통령 당선이 유일하니 우연치고는 참 특이하다 싶다.-- 4월 23일에 드디어
뉴올리언스에서 설탕과 다른 곡물들을 만재한 선박, ‘General Thornton’이 시카고에 도착하여 버팔로로
향한 것을 시작으로 , 이 운하를 통해 목재와 공산품이 서부로, 내륙에서
생산된 곡물들이 동부로 운송된다. 이
운하 개통 첫 해에 세인트루이스의 곡물 거래량이 절반으로 줄어 들었다고 하고, 운하 주위에 많은 타운들이
생겨난 것만 보아도 일리노이-미시간 운하가 일리노이에 끼친 큰 영향을 알 만 하다.
물론 사람들의 왕래도 운하로 인해 더욱 빈번하여졌고, 시카고 인구도
급성장하게 된다. 1848년 운하 개통과 함께 시작된 것이 나무를 주 재료로 하여 시카고 주위에 하이웨이
(turnpike) 만들기 이다. ‘운하와 나무로 된 하이웨이’. 이만하면 경제 성장에는 환상적 콤비여서 시카고가 드디어 진정한 교역 센터가 되겠다 싶었는데, 1848년 11월20일에 더 큰 (?) 일이 벌어진다. 철도
서비스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번에 살펴보겠다. <계속>
2015.05.01 19:35
김신-김광정교수가 들려주는 시카고역사 이야기 <6>: 명실상부한 교역의 교차로, ‘모던 시카고’ 1848년 시작되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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