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김광정 교수> 우리는, 시카고역사 6 & 7에서 중서부 최대 교역도시인 ‘모던 시카고’는 철도와 일리노이-미시간운하로 인하여 신속하고
저렴한 물품 운송이 가능하여짐으로 1848년에 시작되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운하와 철도를
통해 시카고에 들어온 물품들이 곧 바로 다른 지역으로 운송되어 나갔었다면 시카고의 발전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수도 있기에, 오늘은, 쏟아져 들어온 물품들을 어떻게 보관하고 분배하였는지를 살펴 보겠다. 기실, 시카고에는 운하와 철도 개통 직전에 물품 보관-분배 시스템이 이미 시작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운하와 철도가 개통되어 그 영향이 더 크게 증폭되어
시카고가 눈부신 발전을 하였던 것이다. 여하튼, 물품보존-분배라는 면에서도, 1848년은 시카고에 아주 특별한 해라고 할 수 있겠다. 1848년 1월에 시카고에
전보 서비스가 시작되어 외부, 특히 동부 거래선과의 연락이 수월해졌고, 82개의 시카고 비지니스들이 모여 3월5일에 만들어진 시카고
물품거래소 (Chicago Board of Trade-CBT)로 인해 물품거래가 원활하여졌으며,
곡물 엘레베이터 (grain elevator)가 시작되어 곡물의 보관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이 시기에 시카고에서 거래된 주요 물품들을 아주 간단히
살펴보면: 동부에서 공산품이 들어와 중서부 각 지역으로 분배되었고, 중서부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이
동부로 팔려 나갔었다. 공산품을 내륙
각 지역으로 분배하는 것은, 시카고 시내에 형성된 대형 상가들이, 후에
시작된 우편주문 (mail-order) 사업체들과 함께 담당하였기에 별 문제가 없었으나, 생산 시기가 제한되어있는 농산물의 경우에는 보관과 분배의 연결고리가 복잡하여서 보관-분배 시스템이
중요 하여진다. 이 당시 시카고에서 거래된 농산물은 주로 곡물 (grain)과 가축 (livestock)인데, 가축 거래에 대하여는
다음 컬럼에서 남북전쟁의 영향과 함께 살필 예정이어서, 오늘은 곡물 보존-분배에 대해서만 살펴본다. 시카고에서 거래된 곡물은 소맥 (wheat)과 옥수수 (corn)이다. 흔히,
중서부의 대표적인 농산물로는 옥수수를 떠올리는 데, 이 당시 시카고에서는 소맥의
거래량이 훨씬 많았다. 이는, 소맥의 현금 가치가 옥수수보다 훨씬 높아서
농부들이 소맥을 선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맥은 추수 기간이 무척 짧고 그 기간을 놓치면 상품 가치가 급속하게 떨어지는 약점이
있었다. 이 약점을 보완하여, 시카고에서의 소맥 거래량이 증가되었던
첫 번째 공로는, 1847년에 버지니아에서 시카고로 옮겨와 소맥 추수 기계 (wheat
reaper)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이를 현대적인 판매 방법 (sales
strategies)으로 중서부 농부들에게 판매하여, 소맥 추수를 제 때에 할 수
있게 한 맥코믹 공장 (McCormick Works)에게 돌아간다. 참고로, 이 회사는 후에
International Harvesters가 되었다. 일단 추수한 소맥의 거래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처음에는 ‘pit’이라 불리운 시카고 물품 거래소 (CBT)의 매장에 쌓아 놓고 거래를 하였는데,
운하와 철도를 통해 쏟아져 오는 물량을 감당할 수 없어 시작된 것이 대형 곡물 엘레베이터이다. 각 곡물 엘레베이터에서 CBT에서 파견한 조사관 (graders)이 농부들이 가져온 곡물의 양과 질을 명시한 증명서
(grain receipt)를 발부하였고, 농부들은 --곡물은 엘레베이터에 넣어둔 채로-- 이 증명서만을CBT에 가지고 가서 거래를 성사시켰다. 이만하면, 거래의 효율성이 충분하게 커졌을 것인데, 곡물
거래의 신속성을 더 높이기 위해 시작된 방법이, 곡물 엘리베이터의 한 쪽으로 들어온 곡물을 엘레베이터 다른 쪽에서 직접 동부로 향하는 선박으로 옮겨 싣는 거래 방법이다. 여기에는 조사관들의 증명서 (grain
receipt)에 대한 신뢰와 전보 서비스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리하여,
곡물 거래량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1856년에는 시카고에서 적재한 소맥이 영국 리버폴까지
운송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시카고는1848년을 기점으로 억센 신흥 마을에서 현대 도시 (urban city)로 변모를 시작하였는데,
시카고가 진정한 대도시로 도약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요인은 시카고의 상하수도 문제였다. 초기부터 시카고 주민들은, 마시는 물은 미시간 호수에서 끌어다 사용하였고, 배설물은 시카고강에 버렸다. 그리고 시카고강은 동쪽으로 흘러 미시간 호수에 합류한다.
그런데, 도시가 팽창하면서 온갖 배설물도 같이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미시간 호수의 오염이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습지에 형성된 시카고에, 심각한 미시간 호수의 오염이 더해 지면서,
시카고는 잦은 전염병 유행을 겪는다. 특히 1854년 여름에
시카고를 덮친 콜레라는 인구의 6%를 몇 달 사이에 사망시킬 정도로 영향이 컸다. 해결 방법은 시카고강을 서쪽으로 역류시켜 미시간 호수의 오염을
방지하는 것 뿐이라는 결론에, 시카고강의 지반을 파서 역류를 시도한다. 이와 함께, 시작한 사업이 하수도 시설인데, 습하고 약한
지반으로 기존의 건물 지하로 하수도를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1855년에 시카고 시의회는 시카고
시내의 모든 건물을4~5 피트 가량 들어 올려 하수구를 설치할 것을 결의한다. 이로써 시카고 시내의 거의 모든 건물이 들어 올려졌는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5층 건물이었던 브릭스
호텔 (Brigg’s Hotel)이 호텔 영업을 하는 상태에서 들어 올려진 것이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뉴스가 되었다. 새로 설치된 하수도 시설로 배설물을 처리하니, 시카고 시내가 위생적이 되어 안심한 것도 잠시,
몇 번에 걸친 시카고강 역류공사가 번번히 실패하면서 미시간 호수의 오염은 여전하게 된다. 이렇게 장기적으로 해결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카고의
상하수도 문제는, 1900년에 완공된Sanitary and Ship 운하로 완전히 해결이 된다. 지금도 ‘세계 엔지니어링의
7대 쾌거’의 하나로 불리우는 이 운하 이야기는 후에 살펴 보도록 하겠다.
어찌보면, 이 심각한 상수도오염 문제가 북부 교외 확장의 동기를 마련한 것이 아닌가 싶어,
‘세옹지마’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2015.06.14 20:43
김신-김광정교수가 들려주는 시카고역사이야기 <8> : ‘모던 시카고’의 물품 보관/분배 시스템과 상하수도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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