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김광정 교수>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미국에 ‘남북전쟁’이 없었다면, 현재의 미국이 가능하였을까?” 우리는 미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Maybe”에서 “Probably
not”으로, 그리고 “No”로 변하는 경험을
하였다. 남북전쟁은 미국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고 할 정도로 피해가 엄청 났던 전쟁이었지만, 미국같이 광대한 영토에서 하나의 민주공화국 체재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필요했던 댓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잘 아는대로, 남북전쟁은 “Civil War” (내란)이다. 내란은, 하나의 나라가 최소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지고, 그것이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남북전쟁의 경우에는, 확장되는 영토와 급증하는 유럽이민, 그리고 변화하는 경제 시스템에 대한 적응 부족에서 야기된 사회 풍조를 배경으로 볼 수 있는데, 전쟁의 실질적 과정은1860년12월20일에 남부 7개 주 (states)가 미합중국 (USA)에서 탈퇴하고, 남부 연합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the Confederacy)을 세워 독립을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무력 충돌은 거의 4개월 후인1861년 4월 12일 연방 소속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포트섬터
(Fort Sumter)를 남부 연합이 함락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이어진 링컨 대통령의
군인 동원 요청을 계기로, 또 다른 남부4개의 주가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 연합에 가담하였지만 남부의 열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고, 1865년
4월 9일 버지니아의 아포마톡스 (Appomattox)에서 남군의 항복이 있기까지 남부 지역은 완전 초토화되는 수모를 겪었다. 남군의 항복 일 주일만에 링컨이 저격당해 사망하는 등 남북전쟁은
역사적 애물 단지로 불릴 정도이다. 여기에는, 링컨대통령-로버트 리- U.S. 그랜트 장군 등 유명 인사도 많았고, ‘게티스버그 연설’ 등
감명적인 사건도 많은 데, 특히 사진 기록이 아주 많다.
여하간, 이렇게 미국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이 남북전쟁이
시카고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시카고에게 남북전쟁은 예상치 못했던 ‘덩굴째 굴러 온 호박’ 그 자체이었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전쟁 피해는 별로 없이,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시카고의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미 중서부의 최대도시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카고에게 남북전쟁이 ‘뜻밖의 횡재’가 되었던 배경에는, 첫째,
시카고의 위치가 남북전쟁의 실제 전쟁터와는 많이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전쟁 폐해는 없었고, 둘째, 시카고 경제에 남부 지역과의 교역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에, 전쟁발발로 인한 교역량 감소가 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셋째,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물품 운송수단과 교역시스템이 완벽하게 자리잡혀 있어 북군의 전쟁 물자 조달에 적격이었고, 넷쨰, 전쟁 수행을 위해 연방정부 (Union)에서 시카고에
직접 쏟아 부은 재정이 엄청났으며, 다섯쨰, 전쟁을 계기로 시카고의 제조업과 인구가 급팽창한 점을 들 수 있다. 두가지 에피소드를 덧붙이면: 첫쨰, 남북전쟁에
종군한 시카고 출신 약 26,000명 중 많은 사람들이 이민자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민자들은 전쟁 참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시카고에서는 어떻게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났었을까? 살펴보니, 시카고의 이민자들이 미국 태생자들의 징집의무를
(물론 돈을 받고) 대리복무하였다고 한다. 이민자들의 대리복무를 주선하여 주고 돈을 번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어쩔 수 없구나 싶어진다. 둘째, 일리노이 출신 연방상원의원
스테판 더글라스 (Stephen Douglas)의 소유지였던 시카고의31-33가와 Giles & Cottage Grove에 12,000명의 포로를 수용한 큰 남군포로수용소 (Camp Douglas)를 만들어, 주말이면 시카고 주민들이 남군 포로들의 남루한 모습을 보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이를 수치스러워 하였던 남부연합 대통령 데이비스가 1864년에 스파이를 보내 탈옥을 시도하게
하였지만 무위로 끝났다는 기록이 있다. 연방상원의원과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과 대결하였던 더글라스이어서, 혹시 정적에 대한 보복이었나
싶었는데, 그것은 결코 아니어서 안심을 하기도 하였다. 선거에서는 경쟁자이었으나, 선거 후에는 링컨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더글라스는 남북전쟁 발발 2달만에 질병으로 사망하여
애석함을 안겨 주었다. 남북전쟁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연방정부가 시카고 경제에 쏟아 부은 예산은 얼마나 되었을까?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군인들의 피복마련에 1861년에 2백 5십만 불, 1863년에는 1천 2백만불을, 군화 구입에 1861년에 2백5십만불, 1863년에는 1천4백만불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군인 훈련 등
다른 일차적 전쟁 비용도 아주 많이 쏟아 부었지만, 간접적-부차적인
자원규모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시카고의 제조업체는 단연코 밀추수기계
공장인 McCormick Works이다. 시카고의 밀 (소맥)교역량이 1861년에 3천만 부셀 (bushel)에서 1863년에
6천5백만 부셀로 늘어난 배경에는 맥코믹 추수기계가 있었는데, 북군의 국방장관 Stanton이 맥코믹 추수기가 없었다면 북군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맥코믹공장은 남북전쟁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남북전쟁을 계기로 시카고의 제조업이 아주 다양하여지고 확장되었으며,
타 지역에서 유입된 공장과 새로 시작된 공장이 아주 많이 늘어나면서, 인구도 급증하고
지리적 팽창도 이뤄졌다. 인구가 늘어나니,
건물에 대한 수요도 커져서, 목재산업도 팽창하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남북전쟁을 계기로 가장 유명하게 된 사업체는 유니언
스탁야드 (Union Stockyard)이다. 지면관계로 오늘은 유니언가축도살장의
사진 하나만 보여주고 자세한 설명은 다음 회로 미룬다.
김신-김광정교수가 들려주는 시카고역사이야기<9>: 시카고와 남북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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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김광정교수의 시카고 이야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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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김광정교수의 시카고 역사이야기l (11): 1871년 시카고 대화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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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김광정 교수의 시카고 역사이야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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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제 32대 시카고 한인 회장 선거 '기호 2번' 진안순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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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김광정교수가 들려주는 시카고역사이야기<9>: 시카고와 남북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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