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매일 아침 뒷동산에 올라 걸어 만드신 우리집 둘레길>
<이향신 권사 / 청운교회>
얼마
전 배우 원빈과 이나영이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결혼식으로 ‘밀밭 오솔길’이 유명해 졌다. ‘밀밭 사이 길’이 맞을 것 같은데 언론에서 ‘밀밭 오솔길’이라 하니
그 또한 예쁜 이름인 것 같다. 그로 인해 사진으로나마 많은 이들이 밀밭 오솔길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얼마 전 고향인 충청도 아산에서 한 길과 만났다. 솔밭 오솔길인데 그 길을
발견하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오솔길이란 산이나 숲 따위에 난 폭이 좁은 호젓한 길로 이름처럼,
의미처럼 예쁜 길이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내 고향도 많이 변했다. 구불구불 하던 길은 곧은 아스팔트 길로 바뀌었다, 그리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길이 막히기도
하여 다른 방향으로 새롭게 길이 나기도 했다. 이런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 고향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작은 뒷산이 있다. ‘안골’이라 부르는데 소나무가 병풍처럼 아늑하게 둘러쳐있어 여름에는 서해로부터 부는 바람이 시원하고
겨울에는 아늑하고 따뜻해 주어 물난리 한번 나지 않은 평온한 마을이다. 이렇게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이루어지게
된 역사를 울 어머니는 아주 자랑스럽게 자주 말씀을 하신다. 당시
나의 큰아버지이신 봉주 외할아버지께서 대전에 사셨는데 어느 날 소나무 묘목을 사 들고 오셔서 집 뒤 황토밭에 심으셨다고 한다.
새댁인 울 엄니는 장정들이 양동이 지게로 길러온 물을 주전자로 옮겨 심겨진 어린 소나무에 물을 따라주었다고 한다.
87세이신 울 엄니가 스무 살에 시집왔을 때였으니 어느덧 67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그
사이 근처 아산만과 삽교천의 제방공사에 쓰려고 흙을 퍼가 언덕은 밭이 되고 밭은 논으로 바뀌었다.
초가지붕이 기와로, 또 양옥집으로 바뀌었지만 소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묵묵히
버티어 지금의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는 뒷마을로 넘어가는 곳에 새로운 연립주택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우리 집 담장을 끼고 지름길을 만들어 다니곤 한다. 어린
시절에는 수풀이 우거져 어두컴컴하고 무서운 곳이라 감히 그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던 곳으로 기억된다.
아직도 나는 그곳을 혼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모처럼
시골에 내려간 날, 좀 한가한 틈을 타 남편과 함께 지름길을 따라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새로 지은 연립주택으로 가는 지름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좁은 길이 나 있어
그 좁은 길을 따라 가보았다. 오가피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이며 우릴 반겼다. 나는 그곳에 그렇게 많은 오가피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데 숲 가운데로
생긴 오솔길이 막다른 곳을 향하여 나 있었다. 그 쪽으로는 누구도 갈 필요가 없는데 왜 길이 났을까 궁금하여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저쪽으로 길이 나 있던데 거기 사람들이 다닐 곳이 없는데 왜 길이 나 있나요?" “이잉 ~~ 내가 매일 새벽마다 두어 번씩 왔다 갔다 걸어 댕겼지잉” 소나무
숲 뒤 가장자리엔 차가 다닐만한 폭의 길이 있기에 굳이 숲 속 가운데로 다닐 이유가 없었는데 울 아버지께서 그렇게 예쁜 길을 내셨던 것이다.
이른 새벽 일어나시면 한 바퀴 운동을 하고 오신다기에 근처 중학교 쪽으로 다녀오시는 줄 알았다. 이른 아침 작은 오솔길을 만들어 걸으시며 울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난리 통에 떠나신
형님의 묘소를 지나며 그 시절의 마음 아팠던 일을 상기하셨을 터이고, 울 할아버지 묘소를 지나면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또한 여전하셨을 것이다. 태어난 그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오시며 함께 그 땅을 살다 떠나간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하실 때도 있었을 것이다. 평생을
논밭에 파묻혀 일을 하시다가 이젠 큰 농사일은 손을 놓으시고 텃밭을 일구며 노년의 여유를 갖고 새벽 산책길을 즐기시는 것이다.
그것은 건강을 위한 운동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그리움과 추억을 더듬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요, 고향을 떠나 타향에 흩어져 있는 친척들을 사랑하는 따스한 화롯불이고 지킴이다. 그런 마음이
이렇게 예쁜 우리 아버지만의 솔밭 오솔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도시
정원에 있었으면 우아하게 빼어났을 배롱나무 한 그루가 숲 한 편에 잘 자라고 있었다. “가을에 피면 아주 볼만 혀 ... 한참을 피거덩”
여러
꽃송이가 백일동안 핀다하여 목백일홍이라고 한단다. 또 텃밭 끝에 서 있는 감나무를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심은 지 십년 되었는디 키가 여전히 고만 허네, 더 크지를 않어. 감은 아주 잘 열리는디 말이여”
모처럼
말동무가 되어준 딸이 있어 좋으신지 아버지는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신다. 다음에 또 오게 되면 더 여유롭게 찬찬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겠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할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고향에 소나무를
심어 후손들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선물로 주신 큰아버지께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꽃나무와 과일 나무를 심고 열심히 고향을 가꾸고 지키시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가진 나는 정말 행복하다. 아버지는 내일도 동트는 시간에 일찍 일어나 뜰을 내려와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담 모퉁이를 돌아 소나무 둘레길에 들어서시리라.
아주 예쁘고 짧은 둘레길을. 긴 가뭄 끝에
모처럼 단비가 내린다. 짬을 내어 곧 고향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내 마음은
소녀처럼 또 설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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