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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은 어딜까

                               조현례 /수필가  동화작가     

남편은 가끔 친구들 앞에서 나는 하나님께 지금은 도저히 죽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기도 한다고 말하곤 했다. 즉 남북 통일이 되는걸 보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다고 떼를 쓴다는 말이다.  나는 그럴때 마다 어린애가 생떼를 쓰는 것 같아서 속으로 냉소를 금치 못했지만 한편 연민의 정을 느낄 때도 있었다. 히스기야 왕처럼 더 오래 좀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었기 때문에 남편은 가까운 주변의 친구들 보다는 오래 살고 있는걸까 하고 난 가끔 생각한다.

대지주의 아들로 동경 유학을 한 아버지는 아들(남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 청운동에 집을 장만하고 황해도 연백의 고향집과 서울 집을 왕래하며 두 집 관리를  하셨다. 아버지는 또 고향에서 서울 유학을 꿈 꾸는 가난한 인재들을 도우셨다. 청운동 집을 그들의 근거지로 삼게 해 주셨고 학비보조도 해주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건강(폐결핵)이 좋지 않으셔서 꿈을 다 이루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남편은 아버지의 사랑과 교훈과 영향을 많이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남편의 마음 속에 뚜렷한 고향이라는 의식을 유산으로 심어 놓아 주시고 가신 셈이다.  그의 고향 집 (연백)에는 아직 5형제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 되어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인터넷의 지도로  고향집을 찾았다. 부질 없는줄 알면서도.

남편이70세 때에는 자신이 죽으면 1 2녀에게 남겨 줄 유산으로 고향집을 사진보다 더 상세하게 묘사를 해서 그려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유산(유언)은 자기 집안 내력과 자기 어릴때

자라온 과정을 짧막한 소설처럼 타이프 용지 30매 이상을 찍어 한부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다 읽어보지 않았을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것이 모두 돈이 되는 문서라면 하는 부질 없는 생각을 나는 했었지만.

나의 고향은 어떤가. 조그마한 땅덩어리 나라에서 빚어지는 비극이 나의 살던 고향의 이메이지 역시도 다 헝클어 놓은 것일까. 흩으러 놓은 셈일까.

나는 금강산이 있는 회양에서 태어 났다. 하지만 외가가 있는 금화도 회양도 모두 이북이어서 나는 아버지의 고향 인 강릉이 내 고향이라고 해 왔다. 그러나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강릉은 언제나 나의 마음 속에 나의 고향이 아니었다.

내가 태어난 회양에는 내 가슴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보배와 같은 일화가 하나 살아 있을 뿐이다.

내가 1살이 채 되기 전에 우리 집 식구들은 아름다운 12천봉의 봉우리를 보기 위해 금강산 정상에  올라갔댄다. 그 때 나는 어떤 사람(삯군)에게 업혀서 올라 갔댄다. 정상에 올라가서 우리 부모님들은 갓난 아기였던 나에게 금강산 정상의 정기를 들여 마실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산 꼭대기에서 흘러 내리는 샘물(내게는 생명수)을 떠서 마시게 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이냐. 비록 기억 할 수 없는 추억일 망정 내 맘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해서 그곳을 그리운 나의 고향이라고 자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5살 때 그곳을 떠나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부천군 소사로 이사를 왔다그곳은 복숭아 고장이다. 그 마을을 머리속에 떠 올리기만 해도 이미 복숭아 꽃 향기로 내 가슴은 향기롭고 설렌다.

그곳 소사북 초등학교에서 6년을 마치고 서울의 경기 여중에 입학해서 기차 통학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살 때 불행하게도 6.25전쟁이 일어났고 의사를 만나지 못해 엄마를 잃었기 때문에 그 고장을 그리워 할 수가 없었다. 고향으로 삼기에는 더 더군다나 혐오스러웠고 오히려 기억에서 멀리멀리 떠나버리고만 싶었다.

 

차라리 1.4후퇴때 해군 집으로 시집간 큰언니를 따라 진해로 피난 갔는데 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다시 세상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봄이면 벛꽃이 만발한 턴널 같은 꽃대궐 길을 날마다 뚫고 들어갔다 나와야 학교에 갈 수가있었다.

진해에는 벚꽃 계절이 되면 각 곳에서 벚꽃놀이 하러 몰려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 참으로  잊지 못할 화려한 추억이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곳에는 대학교가 없었으므로 그곳으로 피난 오신 대학교 선생님들이 우리 중 고등 학교에서 가르치셨다. 얼마나 큰 행운이었었는지 모른다.

류경채(화가), 강성희(희곡 작가),조의숙(교육학),강성일(영문학 목사),최귀동(불문학 시인)그리고 한국진(농림부 차관)선생님들이 그곳에서 본교생과 우리 피난 학생들을 열성으로 지도해 주셨다.

그후 피난 온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부산에 있는 본교로 복교하고 수복 후 서울에 와서 대학에 입학 했다그러나 전시가 맺어 준 진해에서의 인연을 잊을수가 없었다.

 

나는 거기 진해에서 만난 스승님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인이 되었으며 문학을 심취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선생님 덕분에 지금까지 나의 생을 풍요롭게 살아 왔음을 새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부터 내 고향은 이미 내 마음 속에  진해가 꿈틀거리고  있었던걸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청춘이 움튼 곳이며 나의 생명의 나무가 뿌리를 내린 곳이 바로 나의 고향이었음을 비로소 찾게 되어 여간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전시에 부모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고아의 심정처럼만큼이나  행복하다 나는 지금.

 산 너머 고요한  바다 건너 묵묵히 기다려 준 남쪽 하늘 바다가의 진해 마을이여

그대가 진정 그리운 나의 고향이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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