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1년 시카고 대화재 (2)- 피해 규모와 1차 복구> 1871년10월8일 일요일 저녁 9시부터 30여 시간 시카고를 휩쓴 대화재의 불길이 얼마나 빠르고 강했는지, 시내 곳곳에 설치되었던 소방전이 온통 녹아내려 미시간호수에서 물동이를 릴레이하여야 했고, 카메라가 남북전쟁 전에 이미 많이 보급되어 있었는데도 대화재의 실제 모습을 담은 사진이 아직까지 한 장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화재를 피하는 과정을 기록한 아주 많은 사람들의 일기를 읽으면 그 참혹함이 ‘아비규환’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어진다. 하늘도 24시간 활활 타오르는 시카고가 불쌍하였던지, 10월 9일 월요일 밤부터 비 (rain)를 내려 준다. 7월 4일 1인치의 비가 온 이후 처음 내리는 반가운 비였다. 그 덕분에, 10월 10일 화요일 아침 화재가 진압되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큰 불’을 잡고 나니, 피해 상황 파악과 이재민 구호가 ‘발등에 떨어진 불’
이 된다. 그런데, 시청과 법원이 불타버렸으니
어찌한다? 급한대로, 제일장로교회로 임시 시청을 옮긴 메이슨
(Roswell B. Mason)시장과 시의회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약탈 (looting)을 막아 비지네스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 당시
미조리 연방군단장 세리단장군의 제의로 연방군을 주요 지역에 배치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계엄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취소되지만, 군대는 축소된 숫자로 시카고에 남아 비지네스경호를 계속하였다. 일리노이 주지사와는 상의도 없이 이리 하였다고 하니, 그 당시 일리노이에서 만연하였던 “시카고는 자본가들의 천국”이란 인식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나보다. 우리는 흔히,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의
정도만 가지고 재난의 피해 규모를 가늠한다. 이런 잣대로 피해 상황을 살펴보자: (1)전소 지역이 200에이커 –동쪽으로 미시간호수, 서쪽으로 시카고강, 남쪽의 해리슨스트리트, 북쪽으로 시카고애배뉴에 걸친 지역; (2) 재산 손실은 그 당시 전 시카고 재산의 1/3인 2천만 내지 2천5백만 불; (3) 사망자는 300명 추정 – 겨우 3백명? 시카고강과 미시간호수에 얼마나 많이 빠져 죽었는 지는 누구도 모른다; (4)
전 인구의 삼분지 일(1/3) 100,000명이 홈리스 -불타버린 주택을 하나에 10피트로 잡아 늘어 놓으면 100마일이 넘는다고 하고 그 외에도 전소는 아니지만 거주할 수 없는 위험한 주택은 부지기수;
(5)전소된 빌딩이 17,450개 - 여기에는 시카고시청(법원), 중앙우체국, 트리뷴타워, 화이트삭스 구장,
제4장로교회, Board of Trade, 스테이트 스트리트의 상가건물 등 시카고가 자랑하던 많은 빌딩들이 포함된다. ; (6) 전소된 도로가73마일, sidewalk이 120 마일, 가로등2,000개 , 등 등. 한 마디로, 시카고 초중심지역의 완전 초토화. 피해를 당하지 않은 그룹이 없었으나, 가장 큰 피해는 극빈자들의 몫이다. 이들은 매 끼니마다 급식소에 줄 서서 급식을 받아야 했고 저녁마다 잠 잘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대다수가 이민자이었던 이들은 이재민구호센터의 Undesirable poor 취급으로 별 도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