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김광정 교수> 이미 살핀 대로, 시카고 대화재가 끝난 그 다음 날 시작된 1차 복구의 목표는 “화재 전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하고,
더 안전한 다운타운 재건”이었는데, 1873년에는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초스피드 초과 달성으로 마무리되어, 시카고는 미국 최대 유통도시,
그리고 필라델피아 서쪽의 제 1의 산업도시로 부상힌다. 전설 속의 새, ‘불사조’(phoenix)처럼 시카고가
살아났다. 그것도 에너지가 넘치는 더
화려한 도시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차 복구의 일등공신은 누구였던가? Potter
Palmer, Marshall Field, George Pullman이 대표하는 기존의 New Money들, William Bross같은 대중연설가들, 그리고
몽고메리 워드 (Montgomery Ward) 같은 신진사업가들을 꼽을 수 있다. 잠깐 여기서 William Ogden같은 시카고 초기 지도자들은 어찌
되었는지 살펴 보겠다. 이들 중 몇 몇은 일리노이 주정부와 연방정부를 상대로 시카고를 위한 로비활동을 하기도
하고, 동부 지역 자본을 끌어오기도 하지만, 다수는 그저 조용히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들이 심혈을 기울였던 시카고가 잿더미가
된 것을 보는 참담한 충격이 너무 크지 않았나 싶다. 어찌 보면 이들이 시카고 대화재의 피해자가 아니었나
싶은데, 이들에 더하여, 시카고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가난한 이민자들도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밀려나게 되어 피해를 입었었다. 2차 복구를 살펴보기 전에, 몽고메리 워드가 1872년부터
시작한 우편주문사업 (mail-order catalogue)을 잠깐 살펴 보겠다. 왜냐하면, 몽고메리워드와 후에 역시 시카고에서 시작된 시어즈 (Sears)로 인해 시카고가 우편주문 카다로그 산업의 메카가 되었는데, 이 사업으로 인하여 미국 농촌
주민과 도시 주민들의 생활 양식이 비슷해졌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33세의 청년 몽고메리 워드는
1865년 시카고에 도착, 마샬필드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중서부 농촌 지역을 돌아다니는 세일즈맨이 되어 농촌 주민들에게 물건을 팔다가 이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1871년
말에 시작할 계획으로 자신과 가족들의 전 재산 $5,000을 끌어모아 창고를 짓고 주문 받아 보낼 물품들을
구입하고, 물품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았는데, 아뿔싸,
1871년의 시카고 대화재로 자신의 전 재산인 물품들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만다. ‘젊음이 재산’ 이라고,
그래도 몽고메리 워드는 포기하지 않고 어렵게 모은 $2,400을 들여 물품을 다시 사들이고,
1872년 가을에 163개의 상품을 선전하는 8x12인치 크기의 1장짜리 카다로그를 40 여명의 각 지역
농부들에게 뿌리면서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 이것은 아주 센세이숀을 일으켰다고 한다. 1872년 말에
1장으로 시작한 카다로그는 1874년에는 8 장, 1875년에는 72장, 1880년대 말이면 24,000개의 품목이 실린 540장으로
늘어난다. 세일즈 전략도 아주 현대식이었고
고용 인력이나 창고 건설에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Richard Sears도 이 번창하는 사업을 보고,
‘나는 더 잘 할 수 있어’하면서 1893년에
이 사업에 뛰어 들었다. 1873년 초, 극심한 경제 불황이 미국 전국을 강타한다. 그래도 시카고는 인구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여러 공사가 계속되고 있어 이 경제 불황이 피해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1873 가을부터
시카고 경제도 주춤주춤거리면서도 1870년대 말까지 정체 상태를 유지한다. 미국 전역도 마찬가지로 1870년대 끝까지 불황이 지속되었었다. 그리하여, 1871년 시카고 대화재의 2차복구는
1880년이 되어서야 시작된다. 1차와 2차
복구가 7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이뤄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1880년부터 1890년대까지 지속된 2차
복구는 시카고 역사에 획기적인 신 기원을 이룬 시대로 구분될 정도로 아주 뜨거웠다. 이 2차 복구로,
첫째, 새로운 건축 기술이 대담하게 사용된 많은 마천루 (skyscraper)들과 최신 건축물이 시카고 다운타운에 들어서면서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건축의 메카 시카고’의 명성이 생겨났고, 둘째, 대중 교통 수단의 혁신으로
시카고가 지역적으로 아주 넓게 확장되었고, 셋째, 인구의 팽창으로 인해
시카고가 미국의 ‘제 2의 도시’ (the Second
city) 가 되었다. 사족이지만, ‘제 2의 도시’라는 용어에는 좋고 나쁜 양면성 의미가 있다. 좋은 의미는, ‘두 번째로 큰 도시’이고, 나쁜 의미는 ‘2등 도시’이다. 시카고가1893년 컬럼비안 박람회 개최 신청을 하였을 때, 동부 도시들이 ‘문화적으로 2등 도시’인 시카고가 박람회를 개최하겠다니 ‘기막혀!’ 하면서
깔보았다고 한다. 밖에서는 어찌 보던지,
시카고 주민들에게 시카고는 단연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고 자랑스런 도시가 되었다. 차치하고, 이렇게 시카고 경치를 바꾸어 놓은 2차 복구는
앞서 언급한 “New Money”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은 많은 건축가들의 대담한 건축 방식 혁신,
예를 들어 steel-frame, floating foundation 과 여러 가지의
건축 방식 기술의 발명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시카고 대화재의 2차
복구는 여러 새로운 발명과 혁신들이 상업화되고 공개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대중교통수단의 발전과 2차복구의 어두운 면은 다음 번에 살피도록 하겠다. <사진은 미국의 첫 번째
skyscraper인 1885년 William Le Baron
Jenney의Home Insurance 빌딩이다. 물론 시카고 다운타운에 세워졌다.>
2015.09.04 16:38
김신, 김광정교수가 들려주는 시카고역사이야기 <13>: 대화재의 2차 복구와 the Second Cit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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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역사의 뒤로 사라져 없어져버렸지만, 제가 처음 시카고에 왔을 때만해도 몽고메리워드 백화점이 시카고 지역 곳곳에 있어서 메일오더 캐더로그를 보며 진열상점에 가서 쇼핑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몽고메리워드 백화점이 시카고에서 시작된 것이었군요. 이래서 저는 김신, 김광정 교수님의 시카고 역사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카고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니까요. 계속하여 좋은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