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김광정 교수> 1830년에 미시간 호수에서 시작하는 시카고강 주변의
땅을 팔기 시작하여, 드디어 1837년 뉴욕시와 뉴올리안스를 연결하는
‘교역의 교차로’, 즉 상업 도시로 공식 출범한 시카고는 남북전쟁을
계기로 제조업이 커지면서 1870년이 되면 3십만 명의 인구를 가진
전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가 된다. 미 독립 전부터 그 당시까지 중서부의
최대 도시였던 세인트루이스 –당시까지 인구 31만명의
4번째 대도시-를 아주 바짝 뒤쫒고 있던 와중에 일어난 것이, 1871년10월8일 저녁 9시부터 10일 새벽까지 이어졌던 ‘시카고 대화재’
(the Great Chicago Fire)였다. 이 화재로 인해 시카고 중심 지역은
–화재 소식에 뉴욕에서 급히 달려온 초대 시장 옥덴이 자기 집을 찾아가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고, 인구의 1/3이 하루 아침에 무일푼
홈리스 (homeless)로 길가에 나앉게 되면서, 시카고 리더들을
(요즘 말로) ‘멘붕’에 빠뜨린 것도 잠깐,
시카고 특유의 “우리는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정신으로 대화재의 복구가 숨가쁘게 진행된다. 그러다가, 1873년 가을이 되면서 대화재의 복구가 주춤주춤하더니 2년만인 1873년 말이 되니, 덜거덕하고 끝나게 된다.
대화재의 1차 복구라 명명된 1871-1873년의 복구로 다운타운은 화재 전보다 더 웅장하게 커졌고, 인구도 가파르게 늘어나면서
시카고는 ‘불사조’라는 애칭을 얻는다. 한편 1873년에 미국과 유럽을 강타한 경제 불황은 어찌나
극심하였는지 1930년대 까지 1873-1879년의 불황을 ‘경제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시카고 경제가 주춤거리고 화재 복구도 정체 상태가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도,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2차 복구가 시작되는 1880년의 시카고 인구는 5십만 명을 넘어 미국에서 이제 4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세인트루이스는 35만의 인구로
6번째 도시로 밀려난다. 그리고, 1880년대
내내 뜨거웠던 대화재의 2차 복구로 인해 시카고는 드디어1890년에
인구 백 만명을 훌쩍 넘으면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the Second City’가 되어 1980년도까지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지난 번에 언급한대로, 1880년대의 2차 복구의 백미는 단연코 여러 신진 건축가들이 시도한 대담한 건축 방식의 혁신이다. 이는,
물론 시카고의 부자들이 건축가들을 믿고 재정적으로 밀어 주었기에 가능하였던 일이었다. 미국 다른 지역에서는 그 당시까지도, 건축가는 부자들의 주문대로 건물을 지어 주는 정도에 그쳤는데,
1880년대 시카고에서는 건축가들이 주도권을 갖고 시도한 새로운 건축물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여서, 이로부터 ‘건축가’의 정의가 달라졌다고 한다. 1880년~1890년대에 시카고의 팽창 요인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점 중 하나는, 대중 교통 수단의 발전이다.
1859년 시카고에 소개되어 대화재 때에 널리 사용되었던 대중 교통 수단은 말 (horse)이 끄는 전차 (omnibus on rail)인데, 기껏해야
시속 4~5마일에 그쳤다고 한다. 대화재에 녹아버린 레일을 다시 설치하여
그럭저럭 사용하는데, 전차를 이끄는 말이 내는 소음과 배설물로 다운타운은 지저분하고 냄새로 진동하여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침 187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에서
케이블 (cable) 전차 운행이 시작된다. 무섭게 성장하는 시카고가
이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드디어 시카고에 이 케이블 전차가 도입되는데, 이에 드는 건설 비용이 엄청났다. 그래도, 여러 개의
차량을 연결하여 운행할 수 있어서 설치하고 얼마의 시간만 지나면 경제적으로도 이윤이 되겠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시카고의 모든 것이 그랬듯이, 케이블 전차 도입도 주판 알을 튕기는 사업적인 결정이었던 것이다.
여하간,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케이블 전차의 효시는 1882년 1월에 개통된 메디슨 (Madison St)에서
21가에 이르는 ‘스테이트 (State Street) 전차선’이다. 이 4마일의 트랙을 놓는데
소요된 시간이 4개월, 1,500명의 인부, 1천만 파운드의 철강 (iron & steel), 4만4천 파운드의 시멘트, 3십만 피트의 목재가 동원되는 등, 총 건설 비용이 무려 4십만불이나 소요되었다. 4 마일에
40만 불이라니 가히 천문학적인 수치이다. 도무지 수익성이 없어보였던 이 공사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밀어부친 비지니스의 계산이 적중하여, 10개의 차량을 연결하여 운행한 이 케이블 전차는 개통식에 3십만의 인파가 모일 정도로 대성공을
이룬다. 케이블 전차의 주행 속도는 한 시간에 평균 9-12마일이다. 말을 이용하지 않아 깨끗하고 훨씬 더 빠르니 큰 환영을 받게 되어 빠르게 확산된다. 케이블
전차로 가장 먼저,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곳은 시카고의 남부 지역이다. 북부 지역에는1882년, 서부 지역은
1890년에 케이블 전차가 시작된다. 모든 노선이 다운타운을 돌아 나오게 되어있어
--그래서 다운타운을 Loop이라 불렀다-- 다운타운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고, 동시에, 거주 지역이
빠르게 넓혀지게 된다. 전차 노선에서 얼마나 떨어졌느냐가 토지, 주택
가격을 결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19세기 시카고에는 케이블
전차와 함께 1890년에 개통된 --번잡한 다운타운의 교통 혼잡을 피할
수 있는—고가 전차 (elevated line)가 있어,
팽창하는 인구의 거주 지역을 확산시키며 시카고를 전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를 만드는
데 많은 공헌을 한다. 이러한 대중 교통 수단의 발전은 동시에 엄청난 시카고의 ‘정치 부패’를
낳는다. 시카고에서의 ‘정경 유착’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니 놀라울 것도 없다 싶지만, 이 전차 노선을 둘러싼 ‘뇌물 수수’는 시의원에게 주었던
뇌물을 ‘boodle,’ 뇌물 주는 행위를 ‘boodling,’ 뇌물
수수자를 ‘boodler’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오랜 기간동안 공공연하게 성행하였다. 1896년 시카고 시의원 68명 중에 57명이 상습적인 ‘boodler’ 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1893년의 컬럼비아 박람회를 보기 전에 반드시 살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1884년에 완공한 풀만타운 의 건설과
1886년의 헤이 마켓 폭탄 투척 (Haymarket bombing) 사건이다.
‘Boodling’과 함께, 이 두 사건은 그 당시 시카고, 아니 미국에서의 ‘노사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주류언론의 경제유착을 드러낸 사건들로, 대화재 이후의 시카고
성장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면서 시카고의 악명 (?)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번에 하겠다. <사진 설명> 1. 1890년대 매디슨 스트릿카의 모습 2. 1896년 시카고 다운타운의 고가철로 (Elavated line) 공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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