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행형(行刑) 제도 / 김명렬

by 관리자 posted Sep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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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렬 / 문필가>


세상을 살면서 나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었고, 나쁜 해악질을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해주고 싶고 그에 상응한 벌을 주고 싶은 마음을 누구나 갖고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말이 있다. 몹쓸 짓을 한 사람에게 딱 그 사람이 한 짓 대로 해주어서 자신이 저지른 못쓸 짓 때문에 상대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피해를 당했는지 알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하는 말이다. 그렇긴 해도 죄를 저질러 벌을 받는다는 것은 역시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무서워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를 지으면 그 죄인은 당연히 그 죄의 댓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 (大明律)을 따라 태형 (笞刑), 장형 (杖刑), 도형 (徒刑), 유형 (流刑), 사형 (死刑) 5가지 형벌이 있었다. 대명률이란 1397년에 반포되어 명나라 이후 청나라까지, 5백여년 동안 형률의 근본이 되었던 총 30권에 망라된 중국의 법전이다. 

이를 종류별로 형벌을 구분하여 설명을 한다면:

1.   

1. 태형: 태형은 가벼운 죄를 지은 경우로 물푸레 나무로 만든 매를 사용해 10~50대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눠 둔부를 치는 벌이다. 태형은 조선말 장형이 폐지된 뒤에도 오랫동안 존속되다가 1920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2.    

장형: 장형은 태형보다 무거운 죄를 지은 경우로 60~100대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뉘어 둔부를 치는 벌이다. 흔히 말하기를 곤장이라는 형벌이 바로 이 장형이다. 어느 옥중기에 써있는 내용을 보면 곤장10대를 맞으면 살점이 심하게 떨어져 나가고 그것이 회복되기까지는 한달이 걸렸다고 씌여 있을 정도이며 장 1이면 거의 초죽음이 될 정도로 사망율이 높은 형벌이었다. 태형과 장형은 두 가지 모두 부녀자는 옷을 벗기지는 않았지만 간음한 여자는 옷을 벗기고 집행하였다. 70세 이상의 노인이나 15세이하의 어린이, 폐병 환자, 그리고 임신부는 매가 아닌 벌금으로 속전 (贖錢)을 받았다고도 한다. 장형은 갑오경장 이듬해인 1895년 행형제도를 개혁하면서 폐지되었다.


3.    3도형: 도형은 지금의 징역형과 유사하며 중죄를 범한 자에게 노역을 시키는 형법이다. 60대부터 최대 장100대를 맞고 죄질에 따라 1년에서 최대3년까지 노역 기간을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복역 중 병이 난 사람에게는 병가를 주었고, 역모죄가 아니면 부모상을 당한 경우 휴일을 주기도 했다.

4. 

4.    

유형: 유형은 매우 중한 죄에 대한 형벌로, 사형 대신 먼 지방에 유배를 보내 죽을 때까지 살게 한 벌이다. 2천리, 2천오백리, 3천리등 3등급의 유배 거리가 있었지만 중국과는 달리 국토가 좁아 유배지로 곧장 가지 않고 거리에 맞게 빙빙 돌아가기도 했다. 유배지는 함경도, 평안도등 국경지역이 가장 많았고 경상도, 전라도의 거제도, 진도, 추자도 등 섬지방도 자주 이용되었다. 외부출입을 금지한 안치 (安置)는 본향안치 (本鄕安置), 절도안치 (絶島安置), 위리안치 (圍籬安置), 천극안치의 4가지로 나누었으며 왕족이나 고위 관리에게만 적용되었다.
본향안치는 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 생활을 하게한 것으로 비교적 죄가 가벼운 죄인의 경우에 해당된다. 절도안치는 홀로 육지나 멀리 떨어진 섬에 격리한 것이고, 위리안치는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를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둘러싸 외인의 출입을 금했다. 10일에 한번 음식을 넣어 주는 것  외에는 대문도 항상 밖에서 자물쇠로 채웠으며 담장 안에 우물을 파서 생활을 하게 했다. 광해군의 세자 이지는 인조반정으로 폐세자가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는데 울타리 밖으로 땅굴을 파서 도망가려다가 나졸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천극안치는 위리안치된 죄인이 기거하는 방 둘레에 탱자나무를 둘러친 것으로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단종복위에 연루된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은 천극안치후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돌우물같은 구덩이를 만든 후 그 속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유배는 선비들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제공해 허준의 동의보감이나 정약용의 흠흠신서 등 여러 서적들이 유배 중에 저술된 것이다.


5.    5사형: 사형은 형벌 중에서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목을 매는 교형, 목을 베는 참형, 그리고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이 있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능지처참을 당하고 죽었다. 큰 역모를 범한 역적의 경우엔 참형으로 베어낸 머리를 여러 사람에게 공개하는 효수에 처해지기도 했다. 효수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국사에 관련된 특별한 사건, 즉 역모 등이 발생했을 때 간혹 시행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갑신정변에 실패한 개화파 요인들이 사형 후 효수되었다. 또한 왕족과 고위 관료에게는 대역죄가 아닌 이상 그들의 품위를 위해 사형이 아닌 사약(賜藥)이 내려졌다. 사약은 마시면 죽는 약이라는 뜻이 아니라 왕이 내린 약이라는 뜻이며 왕이 있는 곳을 향해 4(四拜)하고 마셨다. 사배란 한 번 엎드려 네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말한다.


사형은 '삼복제' (三覆制)에 의해 세 차례의 재판을 하는 신중을 기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3년에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세 차례에 걸쳐 정확히 조사해 아뢰게 하여라. 이는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 혹시 잘못된 것이 있을까 염려하는 까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형 집행에 대한 권한은 오직 국왕에게 있었으며 사형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 차레의 철저한 재판을 거쳤다. 그러나 1739(영조15) 기록에 보면 "경상도 의병사 우하형은 음흉하고 사나우며 형벌을 남용하니 파직하여 다시 등용하지마소서"라는 상소가 들어오는 등 곳곳에서 형벌 남용 사례가 빈번하여 사회 문제로 야기되자 형구의 규격과 사용법을 명시한 흠휼전칙 (欽恤典則),  형법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전률통보 (典律通補) 등 전문 법률 서적이 발행되었. 그리고 지방관이 형장 사용과 법률 집행을 공정하게 하는지 염탐하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등, 영조,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형벌 남용을 철저히 단속하고
형벌 집행을 쇄신한 조치가 시행되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죄의 결과이다. 인과응보 (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행한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결과에 대한 업보, 즉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꼭 성경 말씀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성처럼 죄악이 만연하고 죄를 저지르고도 당연한 것으로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고 사는 파렴치범들이 너무나 많다. 뉴스시간대 TV나 신문을 보면 사건, 사고의 소식들로 가득차 있다.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죄인들에게 조선 시대의 5가지 유형제도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자신에게 가해올 줄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