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 조현례 / 아동문학작가>
요즘은 스스로도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을 꽤 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만나면 모두가 한결같은 인사를 한다.
“건강하시지요?”
그런데 그 말이 웬지 옛날에 들었을때와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냥 내 피부에 와 꽂히듯 실감 나는 소리로 메아리친다. 나는 그런 인사를 받을 때 마다 ‘그런대로 잘 있습니다’ 그러곤 한다.
외래어도 아니고 어디서 새로 배운 말도 아닌 순 우리 말인데 참말이지 ‘그런대로’ 란 낱말이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것처럼 들린다. 내 귀에.
살즈만 의사 (신장 전문의)를 만났다. 지난 6개월에서1년사이에 남편의 체중이 10파운드 이상이 줄었기 때문에 이것 저것 검진을 시작했다. 며칠 전에 위내시경을 검사했고 지금 바이옵시를 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피검사, 소변 검사, 그리고 내주에 신장 검사 (Renal ultra sound)를 하잔다.
그런데 이 노의사--주치의가 새로 신장 전문 의사를 추천해 주셨을 때 나는 젊은 의사 대신에 연세가 좀 드신 분을 선택 했었다--는 덜 바빠서인지, 아니면 그의 취향인지 모르지만 다른 병원 식구들 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왔다 갔다 분주하게 뛰어 다니는 의사의 모습이 아니라, 로맨스 그레이의 머리를 멋지고 말끔하게 빗어 올리고 방금 어딘가로 애인을 만나기 위해 외출하려다가 우리를 잠깐 만나러 온 사람 같은 차림새였다.
그런데 그 의사분은 내가 평생 써오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공책을 들고 나와 우리남편을 인터뷰 하는게 아닌가. 하마터면 ‘내가 몇십년 즐겨 쓰는 공책과 똑같다’고 말할 뻔 했다.
그는 남편의 과거 메디칼 히스토리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부모와 자녀들 간에 있었던, 혹은 있을 만한 희귀병 전염병, 그리고 암 계통의 병 등등. 물론 처음 만나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질의와 답안 작성을 위한 필수적인 면담이었으나 좀 예외적인 경우라고 느꼈다. 철저하게 (thoroughly)란 낱말을 떠올릴수 있을 만큼 빼놓지 않고 샅샅이 들춰 냈다. 그러한 철저함을 보고 우리 두사람은 벌써 그 살즈만 의사에게로 믿음이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우리의 전 비뇨기과 의사가 꽤 젊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에 은퇴한다는 통지서를 받았으므로 이 분도 곧 퇴직하지 않을까 하는 첫날부터 공연한 기우를 했다. 이제 막 60세를 넘겼을까 싶은데 벌써 퇴직 운운 한다면 병 든 사람들을 구해야 할 의사들의 수명이 너무 짧은 것 이 아닐까. ‘100세 시대’라고 너도 나도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와 비례해서 세월은 더 앞서 가는 것만 같다. 나만의 투정은 아니겠지만.
참으로 인생은 백년을 산다 해도 일장춘몽이라고 인생 노래를 욾은 옛 시인들의 마디마디 말들이 새삼 진리인 것처럼 요즘 실감된다. 서양사람들도 비슷하게 느낀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부조리! ‘인생을 부조리’라고 한 까뮈의 글을 읽으면 그가 더 없이 위대해 보인다. 그런 철학적인 표현을 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 수 있을까.
하긴 이 즈음 우리 남편은 전도서를 읽으면서 ‘인생은 헛되고 헛되도다’ 라는 구절을 읽으며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인생의 황혼기를 받아 들이고 있는 듯 하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 내외는 우리 방 수리를 위해서 손자 방에서 잠을 자야 했었다. 텔레비젼도 못보고 음악도 못듣고 큰 소리로 말도 못섞고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우리 방과 크기가 같았지만 그 방에 들어가게 되면 허리를 펼 수가 없는 것 처럼 엉거주춤하게 되고 벙커 침대에서 자야 했으므로 마치 감옥 살이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 방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책을 읽을 수 있다는거였다. 그때 우리는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비슷한 화두를 이룰만한 읽거리를 들고 손자 방으로 밤이면 자러 들어가곤 했었다: 남편은 읽던 성경책을 들고 가서 전도서를 읽었으며 나는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고 있었다.
이제 세상 떠날 즈음에 와서야 인생이 어떤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단 말일까. 지금까지 하나님 은혜로 평탄한 삶을 살아 온 덕분에 그저 속 좋은 사람처럼 태평스럽게 벌어놓은 재물도 없으면서 마음의 부자처럼 살아 온게 뭐 그리 잘못된 것이었을까. 물론 하나님 보시기엔 아직 받기만 한 죄인이지만.
찌그러진 남비를 옛날엔 쓰다가 새걸 사야지 하면서 버리곤 했다. 그래서 사람도 고래장을 지냈을테고. 우리의 죽음도 육신은 그와 다를바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즘 와서 하곤 한다. 옛날 진시황제도, 그리고 세상의 위대하고 아까운 인재들이 다 이 세상을 떠났 듯이 우리만 유독 오래 머믈겠다는 생각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듯 오래 살았으면서도 미적미적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걸까.
스티브 잡스는 죽기 전에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생들 앞에서 명강의를 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천국에 가고 싶어 하지만 지금 당장 죽으면 천국에 곧장 갈수 있을테니까 지금 죽겠는가 하고 물으면 한사람도 천국에 가겠다는 사람이 없을거라”고 말했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 일까. 나 역시 그런 심정이니까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실랄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100세 까지 살 수 있다면 그 때엔 선뜻 나설 수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