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감상법 1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있습니다.
그것은 원작자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감상하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고 느낌이 다른
이유에서 인데요.
그래서 모든 예술작품에서는
deformation(데포르망,데포르메,데포르메이션,데포르마시옹)이라들 읽습니다
.
사전적의미는 변형, 왜곡 인데요.
추상화들은 데포르메이션의 궁극을 보여줍니다.
못그린 그림이 아닌 어떻게 일그러뜨리는가의 정점을 말이죠....
기존의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무한한 감정이나 사상을 자신의 의도대로
일그러뜨리는데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무한한 해석차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것과 deformation을 이해하면
어느정도는
인내(?)하시고 보시는것이 가능하실줄도...
추상적으로 때운 작품인가, 아니면 의도대로 추상화시켰는가도 굉장히
중요한 관점이겠죠?^^
그림 감상법 2
그림감상 '초짜님'들이 그림 앞에 서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 "너무 어려워!", "이 그림이 뭘 뜻하는걸까?" 등등
그러니까 반드시 정확한 의미나 형상이 와다아야지만 만족을 한다.
이제부터 이런분들을 위해서 내 나름대로의 그림보는 법을 알려
드릴까한다.
*(첫째, 기본적인 미술사와 최소한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야구나 축구등의 스포츠를 볼 때
그 게임에 대한 규칙이나 역사적 배경을모르면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미식 축구를 모르는 한국인은 미식축구에 관심이 없다.
또한 골프에 있어서는 박세리가 나오기 전엔 범 국민적으로 무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보기', '버디'등 어려운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마치 예전부터 좋아한 양,
떠들어댄다. 역사와 규칙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그림으로 돌아오면 일반인들은 그림에 대한 역사
또는 최소한의 규칙 또는 제작 방법 등에 대한 지식의 습득도 없이
즉 최소한의 노력도 배제한 채 무작정 보고, 작가들의 애매함만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안 좋은 그림을 배제하고 하는 이야기다.)
그림을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기가 알아야할 것은 알아야 한다.
조금만 공부하면 즐거운 감상시간이 될 것이다.
**(둘째, 남의 이야기에 현혹되지 말라.)
우리는 흔히 대작들이 모두 좋은 그림으로만 알고 있으며
남이 좋다면 잘 모르면서그냥 고개만 끄떡인다.
그림을 감상하는 데에도 주관이 필요하다.
주관이 없으면 고호의 해바라기는 항상 좋은 그림이며, 대작이다.(물론 좋은 그림이다.)
아무리 남들이 좋다 해도 자기가 안 좋으면 그 그림은 졸작이다.
누구나 다, 좋을수만 없다.
이것이 내가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중의 하나이다.
작가도 자기만의 그림 세상을 만들어 가듯이 보는이도 자기만의 눈을 키워야하는 것이다.
남이 좋다고 다 좋다는 생각. 이젠 금물이다.
***(세째, 이해하려 하지마라!)
그림은 감성적인 분야이지 절대 수리적인 분야는 아니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민중미술과 같은 부류의 형식보다는 내용에 더 치중하는 그림은 경우가 조금 틀리다.)
특히 구상이 아닌 추상 앞에서 "이게 무슨 뜻일까?", "이 꿈틀거리는
게 무슨 모양일까?"
도대체 작가는 보여줄 생각도 않고 있는데 관객은
애써 찾으려 한다.
(물론 작가의 역량이 부족한 경우도 허다하다.)
굳이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넷째,그림은 수학이 아니다.)
더이상 르네상스식의 보는 눈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
우리교육의 문제일까? 느껴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그림을 보는 법. 별거 없죠. 최소한의 지식을 가지고(미술사 계보라도) 자기만의 눈을 키우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 이것이 가장 좋은 그림 감상법이 아닐까요?
저만의 제안이었습니다. 동의합니까?...
그림 감상법 3
월나라 사람이 뱀으로 곰탕을 끓여 진나라 손님에게 대접했다.
손님은 맛을 보고 잉어 곰탕이라고 생각하였다.
먹고 난 후 그것이 뱀 곰탕이라는 사실을 알자 그는 목구멍에 손을 넣어
토했다.
이것은 아직 맛을 모르는 것이다." 라고 유주(劉晝)는 말했다.
또 이런 얘기도 있다."송 나라 사람이 연석(燕石)을 습득했는데
그것을 진귀한 옥(玉)이라고 생각하고 구리로 만든 상자에 잘
보관하였다.
뒷날 그것이 평범한 돌이란 것을 알자 상자까지 모두 버렸다.
이것도 옥을 모르는 것이다.
뱀탕을 잉어 곰탕이라고 생각하고, 연석을 옥이라고 생각한 것은 자기 인식 능력에 의한 판별이다.
오판하는 원인은 자기 지식이나 자기의 심미안을 믿는데서 오는 결과이다.
사실, 작가가 귀기(鬼氣) 어린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하여 어두운 색조로 그렸는데
감상자는 자기 취향에 맞게 밝은 색으로 그렸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또한 그 전의 그림은 좋았는데........(어쩌구) 라는 말은 작가는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감상자는 고정되어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배경을 동양의 산수화풍으로 그린 것에
대하여
불만을 제기하는 서양의 평자도 있다고 볼 때, 유주의 말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심괄(沈括)은 말하기를 "일반적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 형상이나
구도,
색채상에 있어서의 결점을 지적할 뿐이다.
그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오묘한 이치 등을 감상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라고 말했다.
또한 왕희지, 고개지, 육탐미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고 하여 세인이 다투어
사들였을 때,
심괄은 이러한 현상은 "그림을 귀로 감상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비록 그들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작품 모두가 다 훌륭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심미 형식을 기준으로 하여 감상한다기보다는
평가, 비평하는 자세로 작품을 대한다.
평가는 감상 이후의 문제이다.
먼저 감상한 후에 그것에 대한 어떤 비평을 가하는 것은 감상자의 자유이다.
작품을 작가 편에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작품이란 감상자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내가 그린 그림이야 어때.
그 어떤 이 왈 "내가 그림이 잘 되었나 못 되었나 알아야지."
그렇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분별>만 배운 것 같다.
살아가기에 힘겨워 항상 두려움을 느껴 온 결과, 마음의 성문이 방어
태세로 닫혀 있다.
예술품을 앞에 두고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왼쪽
두뇌로 판단만 하려 한다.
인생이 불행하다면 그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한 여성이 타자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 한 장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에게 보여 주고 무엇이 보이는지 말 해 보라고 하자.
십중팔구 "탁자 앞에 한 여자가 앉아 있군" 하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다시 이 그림을 좀더 예민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준다고 하자.
그는 그 앞 사람보다 자세하게 여자의 몸차림이라든가,
그림의 구성, 색채의 배합, 느낌 등을 얘기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반응의 범위나 섬세함의 정도가 더욱 넓어서, 그림을 훨씬
잘 감상할 수 있다.
감상자의 눈도 다 같은 눈이 아니니 더욱 더 가슴을 열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동파의 대나무 그림을 보고
그것이 아무런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동양 예술가의 견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잘못이다.
동양에서는 사진과 같이 실물 근사치로 묘사하는 것이 첫째 목표가
아니었다.
예술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가
아니라,
그가 바람에 시달리는 대나무를 바라 보았을 그 순간에 화가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 모든 것을 자기의 생명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그 순간 자체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섬세한 표현을 하자면 고도의 정신 집중과 기술적인 숙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술가는 붓을 들기 전에 그가 종이 위에 옮겨
놓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영상을 마음 속에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영상이 분명치 않으면 그 분명치 않음이 곧 그의 획에
나타나고,
그 결과로 나타난 머뭇거리는 획은 예술가 뿐만 아니라 자연의
도(道)도 훼손한다.
두보(杜甫)는 다음과 같이 예리한 관찰의 결과를 말했다.
"바위 하나를 그리는 데에는 10일이 걸리고, 개울을 하나 그리는 데에는 5일이
걸린다."라고,
물론 여기서의 시간은 기술적인 표현 시간을 말함이
아니고,
[내적인 명상]에 소요되는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의 사상이 마음 속에서 영상화되면 붓을 들고 확실하고 민첩하나,
결코 속되지 않은 필치로 그 사상에 형태를 입힌다.
가장 중요한 것을 스스로의 삶에 우주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림 감상법 4
화가는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 방법은 크게 형태와 색채로 나눌 수 있는데, 형태는 다시 구도, 비례, 배치로 세분할 수 있다.
따라서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 무엇을 어디에 배치하고 어떤 형태로 묘사 할 것인가?
* 어디에 어떤 색을 써서 주제를 부각시키면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할 것 인가?
하는 끊임없는 고뇌를 한다.
또한 가끔은 의외의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1,형
태 회화는 대상이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나 구도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연출하는데
이것이 형태가 주는 효과이다.
1. 구 도 composition 구도란 화가가 비례. 균형. 변화. 강조 등의 의도에
따라
대상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 수평 구도 : 화면을 상하로 이등분하여 대상 아래쪽에 배치
하면 그림의 안정감을 준다.
또한 이 구도는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연상시켜 거리감과 공간감을 준다.
* 수직 구도 : 화면을 좌우로 나누는 것으로 대칭 구도로 많이
활용된다.
또한 이 구도는
대상을 좌우에 대칭적으로 배치 함으로서 긴장감을 준다.
* 사선 구도 : 대상을 대각선상에 배치하여 긴장감과 불안감을 준다.
* 삼각 구도 : 많은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구도로 안정감을
준다.
넓은 밑변에 의한
안정감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특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시선을 위쪽으로 이동 시킨다.
* 역 삼각 구도 : 아래쪽으로 좁아지는 두개의 사선은 강한 역동감과 불안감을 준다.
* 진행 구도 : 한 시점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구도로 운동에 방향성을 준다.
이 진행은 수평, 수직, 사선, 환으로 구분된다.
보통 회화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구도가 단독으로만
사용되면 단조롭기 쉬우므로
다른 구도들과 혼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2. 배 치 화가는 표현하고자 하는 주 대상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주변의 배경 화면 어디에 그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 화면 중앙에 배치 표현하고자 하는 주 대상을 화면의 중앙에 놓으므로 해서
우리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모으는 방법이다.
* 운동의 정점에 배치 群像들의 시선이나 운동의 정점에 주 대상을 그려넣어
관람자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모으는 방법이다.
* 경계선상의 배치 지평선 (하늘과 땅) 수평선 (바다와 하늘) 선명함과
흐림 등의 경계에 주 대상을 표현하여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3. 비례 화면에서 주 대상이 차지하는 비율이나 다른 사물과의 상대적 크기를
말한다.
주 대상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땐 박진감을 주며 작게
그려질 땐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II. 색채와 조명 동양화가 수묵의 농담이나 여백의 효과를 중요시 하는것과는 달리
서양화에서 색조의 효과는 아주 중요하다.
또한 주변의 밝기와 대비시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경우나
주제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춤으로 해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조명이 주는 효과는 대단하다.
그림 감상법 5
1.단독감상법: 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감상하는 방법
- 어떤 특정한 부분을 가리고 감상하기
- 기법을 달리했을 때의 효과와 이러한 기법으로
다른 주제를 표현했을 때의 효과 에 대해서 상상하기
- 감상 후에 작품을 보지 않고 기억을 통해 그려보기
2.비교감상법: 두 가지 이상의 작품을 서로 비교해가면서 감상하는 방법
- 두 작품에서 기법과 주제를 서로 다르게 했을 경우 상상하기
- 어른의 그림과 어린이들의 그림 차이점 감상하기
- 사진과 그림의 차이점 감상하기
- 동양과 서양 그림의 차이점 감상하기
-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의 그림의 차이점 감상하기
- 작품의 종류별로 분류해 각각의 특징 비교 감상하기
(예 : 인상주의 작품의 특징 알아보기-색채의 명쾌함, 주제의 다양함, 경쾌한 붓터치)
3.분석감상법: 구체적으로 작품을 분석해서 각 요소들의 특성을 알아보는방법
- 구도분석
- 색채분석
- 명암분석
- 필치분석
- 형태분석
- 표정과 동세분석
4.종합감상법:
직관적인 감상이라고도 한다.
즉 작품을 보고 바로바로 느껴지는 것들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작품과 감상자가 직접적인 감동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감상은 위에서 설명한 단독감상, 비교감상, 분석감상과 항상 연결 지어져서
감상을 하는 초기에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림 감상 포인트 ^^ )***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그림감상요령으로 유행한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 '본 만큼 알게 된 다'는 말이 더욱 가슴에 다가 온다.
수많은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머릿속에 축적된 그림을 끄집어내어
세상을 바라보게 될때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제주도에서 개인전을 연 나는, 내친김에 제주도의 미술관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덤덤한 마음으로 나간 소개팅에서 기대이상의 '킹카'를 만난
기분이라고 할까.
별 사전정보없이 찾아간 '기당미술관'에서
나는 평소 보고 싶었던 변시지 작가의 작품을 아주 흡족한 눈에 담아올
수 있었다.
그의 원화들은 나의 기대 이상이었다.
화려하지도 화사하지도 않은 그림들이지만, 뭉크의 '절규'가 우리의 눈과 맘을 사로잡듯
그의 작품은 분명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화폭 위엔 황토색의 형태를 드러내는 데 쓴 약간의 검은색
선들이 있을 뿐이지만,
그의 절제된 색들은 넘치는 기운을 안고 있었다.
살아있는 붓자국은 그림을 바라보는 이의 가슴을 쓸어 내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제주도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제주도하면 변시지, 변시지하면 제주도를 떠올린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을 눈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바람,말,태양,바다,돌담,초가,소나무.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제주를 상징하는 소재들이다.
그림속의 한 채뿐인 집, 나무 한그루, 말 한마리는 한없이 외롭기만 한데,
그런 것들이 한편으론 또 더없이 정겹게 느껴지는 건
우리네 인생살이 또한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바람에 휘청이는 나무, 행여 날아가지 않을까 염려스런 초가집,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자아를 보는 것 같아
하염없이 그 곁에 있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저 소박하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통해 인생을 말하는 화가 변시지.
그렇게 그의 그림을 본 만큼, 나는 제주도를, 변시지를, 인생을
알아가고 있었다.
***(제목을 미리 보지말기) ***
"방송을 하면서 그림이 대중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레 그림을 어려운 것, 까다로운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습성때문이죠.
하지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림은 어렵고 난해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즐기면 그만이죠.
저는 그림에 머무는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소화해 내는 거죠.
항상 질문 받는 것도 그거예요.
그림을 어떻게 감상해야 옳은 방법이냐구요.
그때마다 '제목을 미리 보지말라'고 당부합니다.
왜 그러잖아요. 글도 마음상태에 따라 달리 읽히고, 감동도 새롭잖아요.
작가의 의도를 굳이 외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감상, 그것은 본인을 위한몫이니까요."
한젬마 자신도 대중의 눈으로 미술을 대하고 보니 그렇게 편하게 다가을 수가
없다.
여유와 사색으로 들여다보는 그녀만의 독특한 '그림 감상법' .
피카소의 추상화 해석도 문제가 없다.
우리는 '화가' 하면 그림만 그리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아니 화가는 그림만 그리길 원한다.
어쩌면 그 모델은 고흐가 아닐까싶다.
그림에 미쳐 자신의 광끼를 그림에 쏟아 붓고
끝내는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 고흐같은 존재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생애 동안도 그는 화상으로서 화랑에서 일을 했었고
정치적인 관심도 있었으며 성경공부에 빠져 목사가 되려고도 했었고
서점의 점원으로 일을 한적도 있다.
아마도 현대인들은 어떤 화가가 화상일을 했었다고 하면
그 화가는 뭔가 상업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화가로 선입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흐는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았고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끝없는 도전을 했다는 것이다.
또 한명의 대표적인 화가의 전형으로 평생을
그림만 그리며 방대하게 많은 작품을 제작한 피카소를 꼽지만
그 많은 작품 중에 상당한 작품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제작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는 평생을 생계걱정은 뒤로하고 그림만 그려야 하는 것일까.
왜 예술가에게는 이처럼 비현실적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일까.
현시점에서 시대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를 요구하고 있지만
현대인들의 상식과 편견은 한가지 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화가만을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짙다.
최고의
천재로 꼽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
비록 현대와 비교해서 예술가의
위상은 기능인으로서의 역할이었지만
미술사에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 모든 것이 다방면을 넘나든 그의 연구를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지금 자칫 어떤 화가가 그토록 이것저것을 넘나든다면
예술가로 그다지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미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미술사의 발전은
오히려 그림만 그리지 않은 이들에 의해 획이 그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독창성은 남다른 경험과 시각을 통해 가능했고
현재도 화가란 그림만 그리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작업은 다양한 기법으로 새로운 시도를 제시하고 있으며
단지 그리는 것만이 아닌 다양한 시도가 그림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는 모든 분야가 상호교류와 혼합속에 급속도로 변화 발전하고 있으며
예술 또한 장르파괴와 멀티현상을 보이며,
그러한 예술품의 수용을 위해 공간도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점점 현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팔방미인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레오나르도 다빈치'하면 떠오르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모나리자 아닐까.
더구나 이 한 점의 초상화가 그의
천재성을 다각도로 반영하고 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술가는
어떤 제약도 없이 자신의 의지로 작품세계를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불후의 걸작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주문을 받고
제작했던 53x77cm 의 작은 초상화이다.
유화로 그려지긴 했지만 캔버스가 아닌 패널위에 그려진 것이다.
유화이전에는 분말가루로 된 색안료를
계란의 노른자에 개어서 만든 물감은 사용한 템페라 기법이 성행했었다.
그러나 템페라는 빨리 마르고 부드러운 묘사를 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어
계란 노른자 대신 기름을 사용해서 안료를 녹여 사용하여
속도와 붓놀림의 조절이 수월해져서 수정과 완성도를 높힐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재료의 발달이 그림의 역사는 물론이고 감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우리의 눈을 지배한 유화의 역사는 15세기에 본격적으로
열린다.
하지만 그 유화의 절정은 19세기에 가서이며 20-30여종에
불과하던 물감이 90여종에 이르고,
돼지 방광주머니에 반죽상태로 보관하던
물감이 튜브 물감으로 개발됨으로서
자유로운 표현의 장이 열렸던 것이다.
유화 재료가 이 작품에서는 능숙하게 소화되고 있는데
더구나 그의 그림이 이처럼 자연스러운 것은
그가 개발한 윤곽선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스푸마토의 기법 덕분이다.
스푸마토 기법이란 '연기와 같은' 이란 이탈리어로 굴뚝을 통해 연기가
공기로 퍼져 나가면
곧 연기가 공기속으로 퍼져나가면서 연기와 공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다빈치는 경계에 생기는
윤곽선을 흐릿하게 처리함으로써
보는 사람의 머리속에서 윤곽선이 그려
지게 했던 것이다.
16세기 초에 제작된 이 작품은
미술사에 있어서 많은 조짐을 보인 15세기를 딛고 탄생된 명작인셈인데
15세기 본격적으로 사용된 유화뿐아니라
풍경화에 대한 관심과 원근법의 발명이 인물화 뒤의 깊은 원경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위대한 예술도 개인의 천재성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시대가 받쳐준 행운아인 셈이다.
다방면에 관심을 보인 그가 호기심에 비례해 인내와 끈기가 부족하여
미완성으로 그친 작업들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의 결함보다는 남은 걸작을 통해 그의 업적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화가의 대표작을 통해 신화적인 그들의 일면만을 기억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살았던 시대나 삶을 이해해보며 좀더 그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사회는 예술에 향수를 더하며 미화시키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예술은 인간을 담는 것이지 인간을 지배하는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미술 감상의 _첫 단계, 마음 열기 )
'그림'과 '서양화'라는 단어가 미술감상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 같다.
흔히 '그림'하면 그리는 행위만을 떠올리고
서양화하면 유화와 캔바스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나는 종종 곤경에 처하곤 하는데
서양화를 전공했다고 하면 '아 그럼 유화로 그리겠네요? 주로 뭘
그리나요?' 하는 질문과
실제로 나의 복잡하고 설치적인 작품을
보고
'이것도 그림이라고 할 수 있나요?' 라고 의문스러워 할 때다.
그림이라는 단어는 그린다는 행위를 담고 있지만
단순히 그린다는 행위를 벗어나서 통용이 되기도 하며
서양화는 유화로 캔바스에 그리는 행위도 포함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닌
것이다.
그림은 미술에 포함되지만 현대미술의 개념은
현대사회의 변화 속도에 비례해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교육받은 감상법일지라도 변화하는 현대미술의 속도를 돌아 오기에
역부족이고
오히려 현대 미술에 저항감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감상법은 그림에 대한 지식보다는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열기의 훈련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현대의 많은 화가들이 독창성의 명목하에 모니터를 캔바스 삼아 동영상을
담아내고
공간을 캔바스 삼아 레이저를 휘둘르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우리의 머리속에 그림이란 캔바스에 물감으로 그려지는
행위를 떠올린다.
때론 강한 이미지 때문에 변화를 수용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는데
바로 캔바스야말로 미술사에 획기적인 계기이면서도 크나큰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캔바스는 이동과 보관의 편리함을
제공하였고
주문제작의 역할에 필수 불가결한 인과 관계로 맥을 이었다.
그러한 역사속에 많은 유화작품들이 제작되었고
미술관에는 수많은 유화작품들이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유화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견고하고 보존력이 뛰어나 감상하기에 참 좋은 재료이다.
하지만 고대 원시 사회에서부터 미술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동굴의 벽화에 그려져 미술관에 옮기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재료의 부실함으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미술의 역사도 있다.
그렇다면 그림은 벽에 걸려야 하고 감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사실상 미술 감상의 역사가 미술의 역사는 아닌 것이다.
애초에 그림은 감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근대부터 미술은 끊임없이
벽에 걸리는 장식적인 역할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유화가 개발되기 전부터 매우 견고한 재료로 역사를 빛내는 재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프레스코이다.
함몰되었던 폼페이의 벽면에 살아있는 프레스코 덕에 당시 미술 뿐아니라
삶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프레스코는 넓은 벽면을 화폭 삼아 제작하게 되는데
중세 유럽에서 스테인드 글라스와 모자이크 벽화가 활기를 띠면서
자취를 감추다가 르네상스에 와서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의 손길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표면이 훼손되지만 않는다면 그림의 보존력은 반영구적이어서 수명이 길다는
장점은 있지만
표면이 젖어있는 7-8시간 내에 그려야하는 제약이 있기
때문에
큰 작품의 경우 부분적으로 완성시켜야하는 어려움이 있고
시간제약 때문에 제작기간 내내 작가적 역량과 긴장을 요구하게 되고
집중력을 필요로한다.
'최후의 심판' 이라는 미켈란젤로의 이 작품은
그가 60을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뒤 전체의
벽에 1534-1541년간의
긴 세월에 걸쳐 그린 인류의 고귀한
문화유산이다.
얼마 전 복원작업을 거쳐 종교재판 중에
다른 화가들에 의해 덧칠되어 가려지고 벗겨져 잘 보이지 않던 인물들이
선명하게 드러내며 처음의 그 자리를 지키며 시간을 초월해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처럼 미술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목적을 달리하며
다양한 재료속에서 이어져오고 있다.
유화그림이 감상의 편리함과 소장의
편리함을 제공했으나 그것이 미술의 목적은 아닌것이다.
현대미술에서
보이는 재료의 관심과 제도권 밖으로의 움직임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어쩌면 미술 본연의 자리를 향한 회귀 본능임을
바로 이 프레스코 한 점을 통해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이다.
~프레스코화란? 회벽 (석고)에 그림을 그린것....
요즘은 벽화에도 사용한답니다.
조형 작품이건 자연이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형태를 찾기보다는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을 먼저 얻고,
그 조형적 질서를 찾아보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의문을 떠올리고 생각해야 합니다.
즉 작품과의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째서 이 색을 썼을까?
왜 이렇게 격렬히 칠했을까?
이 구도는 왜 이 주제와 어울리는 것일까?
주제는 이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작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작품과 대화를 시작할 때,
감상자는 서서히 작가의 정신에 가까이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수시로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양한 작품을 비교 감상하다 보면 좋은 작품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어느 정도 생깁니다.
많이 알려져 있는 고대의 작품부터 시작해서 현대 미술로 접근하는 것이 좋고,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간략한 미술 이론이나
작가들의 전기 소설을 읽어 나가면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술품은 지나치게 과학적, 분석적, 지적으로 접근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늘 편안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작품을 만나고, 마음으로 대화를 해서
느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와 같은 느낌이 점차
축적되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되고
이해를 통한 즐거움을 얻게 되어
미술의 훌륭한 동반자가 되는 것이지요.
알면 그림 보는 재미가 2배가 됩니다.
-정인성(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