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 철수와 현봉학
“이대로 철수하면 저 피난민들은 다 죽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군함 위에서 알몬드 장군에게 “이대로 철수하면 저 피난민들은 다 죽습니다.”
라고 읍소하는 젊은 한국인 통역관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바로 현봉학 박사입니다.
함흥 태생의 현박사는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주립대학에 유학 2년 후 임상
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하게 됩니다.
1950년 3월에 귀국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을 맞았고 해병대의 문관 겸 알몬드
장군의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일했습니다.
알몬드 군단장이 군단 부참모장인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해병대 대령을 데리고 강원도
고성에 있는 한국 해병대로 시찰을 나왔을 때 영어에 능통한 현봉학은 알몬드 군단장과 한국 해병대
여단장 신현준 준장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습니다. 대화를 마친 후 알몬드 장군은 봉학에게 “당신 영어
를 아주 잘 한다.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습니다. 봉학은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 주립 의과대학
에서 공부했다.”고 대답하자 알몬드 장군은 깜짝 놀라며 “내 고향이 바로 버지니아 주의 루레이(Luray)
다.” 하며 매우 반가워합니다. 이어 알몬드는 “당신 고향은 어디인가?” 라고 묻습니다. 봉학이 “미10
군단 사령부가 위치한 함흥이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알몬드는 반색을 하며 “나와 함께 당신 고향
으로 가자. 그렇지 않아도 우리 부대에는 함흥을 아는 사람이 없어 고민하던 차였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한국 해병대 문관에서 미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현봉학은 의학도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함흥지역의 병원들을 찾아가 미군의 의약품을 지원해 주는 일을 도왔습니다.
현봉학은 현원국 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는 공산 치하 5년 동안 숨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온 여러 교회를 찾아가, 신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적극 돕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스산한 소식이 들려 왔는데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맥아더 원수는 북진을 독려하면서 11월 24일 그 유명한 “End the War Offersive(종전을 위한
총공세)”명령을 하달합니다. 미군 병사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총공
격으로 해석하고, “Home by Christmas Offensive(크리스마스 대공세)로 바꿔 부릅니다.
맥아더 이하 전 미군은 당연히 그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방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팽덕회(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국의 30만의 인민지원군은 한미연합군이 발을 들여
놓지 않은 깊은 산맥을 따라 한미군 후방 깊숙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된 바로
다음날 팽덕회의 인민지원군은 운동방어 전술을 구사해, 한미연합군을 궤멸할 대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인민지원군은 일본군과 대장정을 펼치며 싸운 경험이 있어 이러한 전술에 능란했습니다.
중공군에 포위된 한미연합군은 와해되어 포위망을 뚫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항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 5천명과 피난민 9만 명으로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미국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을 폭격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200여 척이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되었습니다.
당시 피난민이 승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현봉학은 자신이 승선하고 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에게 최대한 많은 수의 피난민을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이에 탄복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 1만 4천 명을 태웁니다.
11척의 함정은 콩나물 시루처럼 군인과 피란민을 싣고 미 7함대 전투함정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으로
출발합니다. 이중 몇 척은 재빨리 사람들을 내리고 다시 흥남항으로 와서 또 사람들을 태워가기도
했습니다.
부산항은 이미 피난민으로 초만원을 이루어 입항을 거부하여 12월 25일 거제도에 내리게 됩니다.
현봉학의 어머니인 신애균 여사는 1951년 거제도에 ‘일맥원’이라는 고아원을 차리고 이어 대광중학교
분교를 열어 함경도에서 어렵게 내려온 사람들을 돌보게 됩니다.
오랫동안 한국은 흥남대철수를 패배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미군은 흥남
에서 많은 병력과 인원을 안전하게 철수시켰기 때문에 이후 전투에서 싸울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이듬해
봄 철수작전을 주도한 알몬드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킵니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생살여탈권을 잘 활용하여 9만8천여 명을 살려 낸 현봉학 박사는 자부심으로 가득찰
것 같지만 지난 50년 동안 누구도 그의 공적을 주목하지 않았듯이 그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살아난 9만8천 명이 아니라 함흥에서 기차타기를 거부한 친구 박재인과 흥남항에서
끝내 배에 타지 못한 2천여 명의 고통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세 차례나 이루어 졌던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지켜 본 그는 “상봉이 아니라, 이제는 이산가족이 한데
살 수 있어야 한다. 남북이 화합하고 통일을 이루는 날이 하루 빨리 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제는 그도 가고 없지만 내년 성탄절까지 현박사가 졸업한 세브란스 의학건문학교(현 연세대 의과대학)
의 옛부지인 세브란스 빌딩 앞에 그의 동상이 건립됩니다. 현박사의 동상 제작은 보훈처가 제안했고 정부
가 30%, 나머지를 민간이 부담하는 형식으로 동상 건립이 합의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인물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