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교수>
*1990년대 중반, 시카고 생활기간이 서울에서의 날들을 훌쩍 넘기면서 미국과 시카고의 역사를 알고 싶었으나, 경제학교수로 은퇴한 후에야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오늘부터 연재할 “시카고역사이야기”가 그 결과물이다.
멍청한 질문 하나: “시카고는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요?”
미국 일리노이 주 북동쪽에 위치한 미시간호수 서남단에 있는 도시이다.
“시카고 시의 형성 주도는 누가 했나?”
물론, 일리노이 주 정부이다. 그렇다면, 1837년 3월 4일 공식 출범한 시카고 시의 역사는 초기 일리노이 주 역사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일리노이 주 승격 역사를 조금 자세히 살펴본다.
일리노이 주는 1818년 12월3일 연방국회의 승인으로 미연방의 21번째 주가 되었다. 주 전체의 인구는 34,670명, 첫 번째 주의 수도는 “카스카스키아 (Kaskaskia)”이다. ‘카스카스키아’ 라는 특이한 이름의 이 도시는 세인트루이스 조금 북쪽, 미시시피 강의 일리노이 강변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는데, 20세기의 미시시피강 홍수로 강물줄기가 움직이는 바람에, 현재는 일리노이 주보다는 미주리 주에 더 가까운 섬이다. 2017년 현재는 13명 인구를 가진 일리노이에서 가장 작은 타운이지만, 1818년 당시에는 7천명 인구로 일리노이 주에서 가장 큰 타운이었고, 1809년 설립된 일리노이 territory 의 수도였다.
일리노이 주의 지리적 경계를 살펴보면, 서편 경계는 물론 미시시피 강이고 남쪽 경계는 오하이오 강, 동쪽은 와바시 강을 따라 인디아나 주와 경계를 이룬다. 이렇게 서쪽, 동쪽, 남쪽 경계는 자연적인 물길, ‘강(River)’으로 쉽게 낙착이 되는데, 자연 지리적인 경계선이 없는 북쪽, 위스콘신 주와의 경계는 어떻게 결정되었을까? 여기에는 흥미로운 역사가 있다.
현재의 오하이오, 인디아나, 일리노이, 미시간, 위스콘신과 미네소타 북동부 1/3지역은 미연방국회나
연방정부가 설립되기 전인 1787년, 대륙의회가 선포한Northwest Ordinance에 포함된 지역이다. 이 조례는 버지니아 대표, 토마스 제퍼슨이 주도한 것으로, 제퍼슨은 이 지역에 노예제도를 허용하지 않는 ‘free state’ 10개 주를 세울 것을 제안하면서, 인구 6만이 되면 하나의 주로 승격시켜 연방에 편입시킨다는 조항을 삽입한다. 제퍼슨의 10개 주 제안은 후에 3개 대형 주를 거쳐, 현재의 5개 반 (5.5)주로 낙착되었다.
이 노스웨스트지역에서 1803년 오하이오가 처음으로 주로 승격했고, 1816년 12월 11일 인디아나가 두 번째로 주가 된다. 제퍼슨은, 인디아나와 일리노이 북쪽 경계를 미시간호수 남쪽 끝에서 동서로 일직선을 그어 인디아나와 일리노이는 미시간호수와는 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1816년은 뉴욕 주의 이리 운하가 착공되던 해인데, 미국에서 ‘물길’을 통한 교역과 오대호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인디아나 주의 북쪽 경계를 미시간 호수 남쪽 끝에서 10마일 올려주어 인디아나가 미시간호수를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인디아나가 주로 승격하고 1년이 지난, 1818년 1월 일리노이 주 승격 법안이 연방국회에 상정되면서 일리노이도 인디아나와 마찬가지로, 10마일 북쪽으로 경계선을 올려 주어 미시간호수를 접하게 했는데 문제가 생긴다. 인디아나처럼 10마일을 올려주어도 일리노이 주 전체의 인구가 필요한 6만을 밑돌아도 훨씬 밑돌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일리노이 대표단이 내놓은 대책이 아주 기발했다. 우선, 자세한 조사가 없었기에 확실한 인구 수는 모른다며 ‘모르쇠’ 하고, 모르긴해도 10마일을 올려 주어도 6만명은 어림도 없으니 더 올려 주어야 한다고 하며, 북쪽경계를 10마일에서 51마일을 더 올려 북서부 갈리나 주위의 광산인구를 일리노이에 포함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북쪽 경계를 61마일 올렸으나, 인구는 여전히 6만에는 크게 밑도는 3만5천명 밖에 되지 않자, 일리노이 대표 나다나엘 퐆 (Nathaniel Pope)의 정치적 역량이 크게 빛을 발한다. 그리하여, 일리노이는, 서쪽경계 미시시피강에서 동쪽 경계 와바시 강까지 동서로 210마일, 남쪽 오하이오강에서 북쪽 경계까지 395마일이나 되는 넓은 영토에 겨우 3만5천명의 인구를 가진 ‘free state’로 1816년 12월 3일 연방에 가입하게 되었다. 주(state)가 되었으니 상원과 하원의원을 국회에 보내게 되었고, 연방정부로부터 도로, 운하 등의 건설비용을 보조 받아 일리노이 내륙 개발을 시작하여 새로운 정착자들이 내륙으로 유입되면서 주가 되고 일 년이 지난 1819년 말이면 인구가 55,211명으로 늘어났다. 한 해 사이에 주 인구가 2만명이 늘어난 것. 좀 억지를 부려서 라도 주로 승격한 것은 참 잘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일리노이의 정치적 텝댄스를 위스콘신은, “대낮에 웬 날 강도!”, “일리노이에게 눈 뜨고 코 베임을 당했다,” “이건 완전 소매치기”라고 했다. 그래서, 위스콘신은 여러 번 일리노이와 위스콘신의 주 경계선 재조정 신청을 내고 기각당하고 하는데, 마지막 시도는 1840년 2월에 있었다. 이때에도 위스콘신 대표단이 제출한 결의안을 의회 법사위원회에서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고 소멸시켰다. 참고로, 위스콘신은 1847년에야 주가 되었는데, 이때 위스콘신 주민 다수는 일리노이와의 경계 문제를 이슈화하지 말자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20세기까지도, 위스콘신에서는 자신들의 영토를 일리노이에게 빼앗겼다는 센티멘트가 강했다.
하마터면, “시카고, 일리노이”가 아니라 “시카고, 위스콘신”이 되었을 뻔한 일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