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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ago History 4.jpg

 

 

 

< 교수>

이미 언급한대로, 일리노이 주정부는 183094일 부터 시카고 지역의 토지를 외부 (동부의 뉴 잉글랜드지역) 자본주에게 팔면서, 뉴욕 시와 뉴올르리안즈를 물길로 연결한 교역의 교차로시카고 시의 개발을 추진한다. 지난번 칼럼 (시카고역사 3- 시카고 개발 과정: 1830-1836)에서 보았듯, 시카고는 교역의 교차로의 원대한 비전보다는부동산 로또의 명성으로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다. 이에 힘입어, 시카고 상주인구가 1830100명에서 1833300명으로 증가하였으나 시(city)로 조직하려면 최소4,000명의 상주인구가 필요했었는데 아직 부족했다.

 

우선, 1830년부터 시카고가 시로 공식 출범한 1837년 까지의 시카고의 부동산 로또로서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살펴보자. 톰슨 도면의 126개의 집터 (lot) 183094일의 공시 가격은 한 lot $25-$35이었다. 몇 달 후인 1831년 초에는 $62~$80에 판매되더니 1835년이 되면 $80,000-$96,700로 껑충 뛴다. 그래서인지, 모리스 (Buckner Morris)는 시카고에서 땅을 사고 팔면서 100% 수익을 얻지 못하면 바보라고 했고, 1832 24십만불이었던 시카고의 토지판매 총액이1836년에는 25백만불로 뛰어오른다.  4년 만에 10배가 되었으니, 초특급 투기 (speculation)라 할 만하다. 1836년 초 시카고를 방문한 마르티노 (Harriet Martineau)는 순전히 토지 판매로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 곳은 처음 본다는 일기를 남겼다.

 

이런 면에서 초대 시카고 시장 옥덴 (William B. Ogden)의 경우도 흥미롭다. 뉴욕 주에서 자리를 잡은 서른 살 총각 옥덴이 1835년 시카고를 찾은 것은, 뉴욕 주 정계의 실세였던 매부의 순전히 서류로 3개의 lot $100,000에 샀으니, 옥덴, 네가 가서 땅을 살펴보고 다시 팔고 오라는 부탁 때문. 옥덴이 시카고에 도착하여 매부가 구입한 땅을 찾아가 보니, 무릎까지 빠지는 늪지였다.  옥덴은 매부가 완전히 속아서 산 것 같다. 여기까지 오느라 지불한 배 삯이 아깝네!”라고 편지를 보내고, 그래도 이왕에 왔으니 시도는 해야지 싶어 물을 빼는 간단한 공사를 하고 땅 한 필지를 내놓았더니 곧바로 $100,000에 팔렸다. 

 

이렇게 위험스러울 정도로 뜨거워진 투기 열기는 그래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을 끌어 들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는지, 시카고 인구가 1835년에는 3,200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물론 일리노이 주정부가 공약한 일리노이-미시간 운하로 인한 이민자들 (특히 아이리시)의 유입도 큰 몫을 한다. 일리노이-미시간 운하는 1836년 여름이 되어서야 착공식을 가졌고, 드디어, 183734일 시카고 시는 옥덴 시장과 6명의 시의원의 취임으로 공식 출범했다. 그때 공식 상주 인구는 3,820명이었다.

 

그렇다고, 시카고시 출범이 경제호황 가운데 이뤄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1836년 가을 180도 바뀐 잭슨(Andrew Jackson) 행정부의 금융정책으로 인해 1836년 말 부터 시카고 땅 값은 폭락하고 파산 신청이 줄을 이었다. 1836년에 25백만 불이었던 토지 판매 총액이 1837년 초에는 1백만 불로 곤두박질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시카고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싶다.  금융정책의 반전으로 시작된1837년의 경제 불황은 거의 7년 동안 아주 극심하였고, 공식 출범하자 마자 바닥난 시의 재정을 보며, 여러 명의 리더들이 시카고 시 정부의 파산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만약 그때 시카고시 정부가 파산하였었다면?

 

경제난과 함께 시작된 시카고는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많은 이들이, 개인 이윤 추구와 시카고 도시 확장을 접목시켰던 비즈니스맨과 엘리트 그룹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이 엘리트 그룹의 좌장이 시카고 초대 시장 옥덴이다. 그는, 주민 공청회에서는 시카고의 핑크빛 미래를 그 특유의 설득력 있는 화술로 설파하여 비관론을 잠재웠고, 뉴욕주의 자본가들을 설득하여 자본을 끌어 들였다. 그래서인지, 18373월에서18381월까지 단10개월 동안 시장으로 재임한 옥덴의 이름을 따서 초기 시카고(1837-1847)옥덴의 시카고 (Ogden’s Chicago)’로 부르기도 한다. 물론, 1836년 말부터 1842년 일리노이 주정부가 파산할 때까지  매달 $75,000의 급료가 운하 공사로 지불되어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엘리트 그룹 내에서의 옥덴의 리더십도 돋보인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비지니스 협상과 시카고에 필요한 infrastructure 구축을 의논하고 결정하여 시카고 시의회에 제출하고 통과시켜 실질적인’shadow city council’이었는데, 이 엘리트 그룹의 멤버가 되는 유일한 자격 조건이 ’, 즉 얼마나 부자인가 이었다. 옥덴은 이러한 졸부ㅍ(?)근성의 리더들에게 문화도시 시카고비전과개인 이윤 창달이 얼마나 긴밀한 연관이 있는지 설득하여, 이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러쉬 의과대학의 터를 무상으로 제공하게 하고, Chicago Historical Society, Academy of Sciences, Chicago Musical Union등등을 설립하게 했다. 옥덴의 리더십 하에 이들은 시카고 경제, 사회, 정치, 문화,교육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이들로 인해 시카고는 철저한 자본가 중심의 경제 시스템의 실험장이 되었다.

 

183732일에 Rush Medical College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에 시립 병원과 보건국 (Board of Health)이 조직되었고, 1835년에 시작된 자원봉사 소방서 (Fire Department)와 감옥(Jail)도 강화했고, 시카고 강에 나무로 된swing bridge도 몇 개 더 세우고,  도시계획 (상하수도 시스템 건설, 운하와 철도의 적극적 후원)도 하고 시카고의 홍등가가 폐쇄되기도 했다.  이러한 infrastructure의 마련과 함께 비즈니스들이 시카고에 생기기 시작했다 (: JD Peacock Jewelers).  또한, 운하로 인해 인구 (특히 이민자)의 유입도 속도가 붙고, 시카고의 지역 신문의 숫자도 늘어났다. 한마디로, 도시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시카고의 토지 투자 버블은 깨졌지만, 시카고의 발전은 어렵지만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계속되었다. 1837 3월에 3,820명이었던 인구는1837 12월에는 4,140, 1839년 말에는 4,470, 1843 7,580, 1844 8,000명이 된.

  

 그래도, 시카고가 소기의 목적대로 교역의 교차로가 된 것은 시로 출범하고도 11년 후인1848년이었다.  그래서 1837년부터 1847년을 초기 시카고라 부른다. 1848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다음 번 칼럼에서 살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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