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신 권사>
새벽기도 후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아파트 울타리 길 바닥에 노란 꽃잎들이 떨어져 있다. 갈 때는 새벽이라 어둠이 가시지 않았기도 하지만 바삐 걷는 발걸음이라 땅바닥을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날이 밝으니 여기 저기 길 위에 떨어져 있는 연노란 감꽃잎들이 보였고 그걸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것이다. 꽃을 줍다가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예쁜 감꽃들이 나뭇잎 사이로 싱그러이 얼굴을 내밀고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언제 이렇게 많이 피었을까. 꽃이 만개하여 길 위에 떨어질 때까지 감나무의 존재도 모른 채 마스크를 쓰고 분주히 그 앞을 지나 다녔다.
우리 아파트는 유실수를 많이 심었는데 그중에 감나무가 여러 그루다. 입주 후 감이 열리면서 가을이면 수확한 감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처음에는 양이 얼마 되지 않아 몇 개씩 분배되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감의 숫자도 많아져 몇 해 전부터는 전체 주민에게 더 많이 전달되고 있다. 개인별로 나누어줄 수 없으니 지난 가을에도 각 동 출입하는 곳에 종이박스에 담아 ‘우리 아파트에서 수확한 것이니 세대별로 갖다 드세요’ 하는 글귀와 함께 놓여 있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생각보다 감이 줄어들지 않았다. 감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지금 가져간들 당장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 땡감이기 때문이어서 일까. 이런 감을 맛있게 먹으려면 베란다에 잘 모셔놓고 홍시가 되기까지의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도심 한 복판 차량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서 열린 감이라 공해에 찌들어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동차를 이용하여 엘리베이터만 타고 오르내리니 감을 담아놓은 박스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감이 눈에 띌 만큼 커졌을 때부터 오가며 처다 보았었다. 푸른 풋감에서 주홍빛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감을 언제쯤 따게 될까 기다렸다. 나목이 되어 겨울을 나는 동안 나에게서도 잊어졌던 나무였는데 감꽃을 떨어뜨려 나를 불렀던 것이다.
어린 시절 뒤란 울타리 안쪽에 큰 감나무가 있었다. 기억에는 이 꽃보다 컸다고 생각되는데 주워서 먹으면 달짝지근하여 먹기도 하고 소꿉놀이도 하고 실이나 풀줄기에 꿰어 목걸이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것을 입에 넣고 살짝 씹어보니 떨떠름하다. 예전의 맛이 아니다. 감꽃 맛이 변한게 아니라 내 입맛이 변한 것일 수도 있다. 꽃을 주워 보도블록 위에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어본다. ‘무슨 꽃일까요?’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내봐야지.
나는 오늘 또 하나의 추억을 담았다. 그리곤 한 움큼 감꽃을 주워와 접시에 담고 그림공책과 색연필을 꺼내 그려보는데 너무 어렵다. 생각같이 표현이 안 된다. 꽃잎과 꽃받침은 여러 장이 아닌 한 장이다. 만두를 빚을 때 만두피 한 장으로 오므려 주름을 잡듯 한 장의 꽃잎이 네 장으로 보인 것이다. 꽃받침 또한 넷인 것 같지만 하나가 주름으로 겹치고 꼭지점을 네 곳에 두어 네 장의 꽃받침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 솜씨를 내가 어떻게 옮겨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 오묘하고 정밀함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끄적끄적 여러 개의 감꽃을 그리는데 다시 들여다보고 또 고치고, 그래도 그 예쁜 모습을 제대로 그릴 수는 없다. 차라리 복잡한 꽃보다 감이 커지면 그 때 감이나 그려볼까? 떨어진 꽃자리에 야무지게 박혀있는 초록의 감이 커져서 주황빛을 띄게 될 때쯤에는 나, 너, 그리고 우리 모두 마스크를 벗고 감을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봄 풀꽃이 지고 초록이 물든 2020년 6월 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