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교수>
시카고가 공식적으로 시(city)로 등재된 것은 1837년 3월4일이고, 그때부터 시카고에는 시장과 시의회를 주축으로 시 정부 운영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1848년 시카고가 드디어 시작되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일리노이 주정부는 시카고를, 오대호 물길을 따라 미 동부(더 멀리는 유럽)와 미시시피강을 통한 남부 (더 크게는 개척이 불붙기 시작한 미 서부)를 연결하는 ‘교역의 교차로’ 로 만들기 위해 개발했다. 그런데, 그 비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해가 시로 승격되고 11년이나 지난 1848년이다.
달리 말하면, 1837-1847년까지는 ‘교역의 교차로’ 시카고의 기반을 다지는 ‘초기 (혹은 옥덴의) 시카고’인 것이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시카고는 1848년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로 인해 가능했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혹자는 시카고가 진정으로 시작된 것은 1848년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여하튼, 1848년이 모던 시카고의 원년이라는 점에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어떻게 교역의 교차로가 되기에 꼭 필요한 일들이 1848년에 일어났는지 크리스탈볼을 드려다 볼 신통력은 없지만, 시카고에게 1848년은 하늘이 내린 대박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1848년 한 해에 일어난 일들로 인해 시카고는 명실상부한 미국의 최대 교역의 교차로로 힘차게 도약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10여년 후인 1860년의 일리노이 출신 링컨 (Abraham Lincoln)의 대통령 당선과 곧 이어 시작된 남북전쟁 (1861-1865)으로 시카고는 급성장의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러니까, 시카고에게 1848년은 ‘신의 한 수, 그것도 크나 큰 한 수’이다. 1848년에 실제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앞으로 몇 번에 걸쳐 살펴보겠는데, 오늘은, 그 당시의 미국의 상황을 살펴보아 시카고에게1848년이 ‘신의 큰 한 수’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겠다.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영토확장.’ 즉,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국가 건설 (국가에 나오는 대로, From sea-대서양- to shining sea-태평양)이었다. 영토확장의 주요 방편은 구매 (purchase)와 전쟁 (war)이었다. 1840년대 이전 다른 국가들의 땅을 사들이는 구매 활동들로는1803년 프랑스에게서 사들인 ‘루이지애나 구매 (Louisiana Purchase)’와1819년 스페인에게서 구매한 ‘플로리다 구매 (Florida Purchase)’ –저자주: 세미놀 (Seminole)의 완강한 무력 반발로 실제 장악은 1842년에야 가능했다)가 있다. 플로리다 구매로 미국 영토는 멕시코가 장악하고 있던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텍사스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으로 확장된다. 아! 물론, Oregon territory로 알려진 (42도 이북) 지역은 영국이 갖고 있었지만 당시 이미 많은 미국 백인들이 서부개척 (진출)을 하고 있었기에 de facto 미국영토로 여겨지고 있었다. 사족으로, 러시아에게서 사들인 알래스카 구매(Alaska Purchase)는 1867년이다.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한 가장 획기적인 것은 멕시칸 전쟁 (1846-4848)이다. 멕시칸 전쟁의 종식과 함께 오레곤 지역 (Oregon Country)과 메인 주 북쪽에 관하여 영국과의 합의도 끌어내어 북위 49도 이남으로부터 멕시코 이북의 북미대륙 내륙에서 현재의 미국영토가 확정되었다. (저자주: 단, 멕시코와의 최남단 경계선은 1853년12월 30일에 Gadsden purchase로 매듭짓게 되었다.)
미국이 영토확장에 연연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인구의 급증이다. 센서스에 따른 미국인구는 1790년3백9십만명, 1820년 9백6십만, 1830년 천2백8십만, 1840년 천 7백십만, 1850년 2천3백2십만 명이다. 어떻게? 자연증가와 이민으로. 이민은 주로 유럽 백인으로 1820년대 초까지는 미미하였으나, 1820년대, 1830년대, 그리고 1840년대 초까지 꾸준히 증가하더니 1840년초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주체할 수 없이 증가하는 인구 문제의 해결을 영토 확장을 통해 이루려 한 데에는 이를 정당화시켜준 이념이 있었다. 이름하여, “Manifest Destiny” 이었다. 그 내용은 첫째, 미국의 민주주의 사회제도의 우월성이 분명하고, 둘째, 이런 훌륭한 제도를 확산시켜야 할 사명이 미국에게 있으며, 셋째, 이런 사명은 하늘이 미국에게 주신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실제 이 용어의 사용은 그 훨씬 후이나, 이 이념을 바탕으로 한 사조가 팽배했었다.이때의 미국인은 오로지 백인 뿐이었다.
멕시칸 전쟁의 빌미는 독립국이었던 텍사스 공화국이 1845년에 미 연방의 텍사스 주로 합병되는 일이 제공했다. 미국 안의 텍사스 공화국이라니? 이에 관하여 잠깐 언급한다. 당시에 멕시코의 영토였던 텍사스에 정착한 미국 백인들은 1835년부터 멕시코에서의 독립을 추진했고, 드디어 1836년 3월 2일에 텍사스 공화국 (Republic of Texas)을 세운다. 이 텍사스 공화국은 독립 국가로 미국을 포함하여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의 공식 인정을 받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 영국은 멕시코와의 관계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정은 하지 않았으나, 외교 관계는 설정하였다. 1845년10월에 미국이 제의한 합병을 주민 투표로 확정하고, 1845년12월29일에 미 연방의 노예허용 주(state)로 합병된다. 왜 텍사스 공화국이 합병에 동의하였나? 처음부터 계획된 시나리오? 정부의 빚 ($10,000,000) 때문에? 이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다. 여하튼, 이 합병 동의안에서 텍사스 공화국은 현재의 콜로라도, 캔자스, 오클라호마, 뉴멕시코, 와이오밍의 일부에 걸친 영토주장 (land claim)을 포기한다.
1846-1848년의 멕시칸 전쟁은 텍사스 합병으로 인해 1846년 4월 30일에 시작되어 미국이 멕시코 시티를 1847년 여름에 점령하면서 끝난 전쟁이다. 1848년2월2일 과다루페이달고 조약체결로, 멕시코는 완전 항복과 함께 텍사스, 뉴멕시코 테리토리, 캘리포니아를 포기하는 대가로 $15,000,000을 받는다. 멕시코가 포기한 뉴멕시코 테리토리와 캘리포니아에서 선조 대대로 살아왔던 멕시칸들은 하루 아침에 불법체류자, 내지는 미 시민권자이나 마이노리티 (2등 국민)로 전락하고 만다. “내가 국경을 넘어가 불법체류자가 된 것이 아니고 국경이 나를 넘어갔다”고 하는 이들 치카노 (Chicano)/치카나(Chicana) 들의 역사도 흑인이나 아메리칸 인디언 역사만큼 눈물로 점철되어 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인구의 움직임과 교역이 극대화 되는 1848년에 때맞춰 교역의 교차로에 필요한 일들이 시카고에 일어났으니, 이는 정녕 ‘신의 한 수’일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