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노이-미시건 운하
첫번 철도 서비스에 사용된 파이오니어 기차
<김 신 교수>
지난 번 칼럼 “시카고역사 #5”는 텍사스 공화국이 미 연방의 텍사스 주로 합병되면서 불거진 멕시칸 전쟁 (1846-48)에서의 승리한 미국이 영국과 북쪽 국경 협상 (캐나다)도 마무리한 것을 살펴보며, “영토가 확장되면서 인구의 움직임과 교역이 극대화되는 1848년에 때맞춰 교역의 교차로에 필요한 일들이 시카고에 일어났으니, 이는 정녕 ‘신의 한 수’일 터!”로 끝났다. 실제로 1848년에 시카고에 교역의 교차로로 도약할 수 있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시카고역사 #5에서 보았 듯, 1848년 미국 내륙의 영토는 확정되었으나, 미시시피강 서부 지역은 아직 완전히 정착되어 있지 않았고, 미 동부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아팔라치안 산맥은 아직도 철도가 뚫려 있지 못한 상황이어서, 미국의 동서 교역은 뉴욕에서 오대호를 통하거나 아니면 플로리다를 삥 돌아 뉴올르리안스로 연결해야만 하였다는 점을 기억하자.
시카고는 순전히 교역의 중심지로 계획되었다.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어떻게 신속하고 저렴하게 교역할 물품을 운송해 들여오고 내보낼 것인가-- 물품 운송 수단의 발전--과 들여온 물품을 어떻게 보관하고 효율적으로 판매하는가--물품 보존과 판매 시스템-- 일 것이다. 1848년 한 해에 시카고에서 이 두 면에서 모두 획기적인 일들이 일어나며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1848년 1월에 전보 (telegraph)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1848년3월에 Chicago Board of Trade (시카고상품거래소)가 조직되었으며, 1848년4월10일에 일리노이-미시간운하가 완공,개통되었고, 1848년 11월에 철도 서비스가 힘차게 시작되었다. 오늘은, 물품 운송 수단 발전에 대하여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개통과 철도 서비스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다음 번 칼럼에서 물품 보존과 판매 시스템에 대해 알아 보겠다.
1.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개통
1837년부터 거의 7년간 미국을 강타한 경제 불황 직전인 1836년 말 착공된 일리노이-미시간 (I-M) 운하 건설은 ‘산 너머 산’ 그 자체였다. 시카고의 이민자 유입을 유발한 계기가 된 이 운하 공사는 1842년에서 1844년까지는 일리노이 주 정부의 파산으로 전면 중단되기도 했고, 공사재개도 거덜난 주 재정으로 인해 시카고 리더들이 운하를 위한 특별 채권 (Bond)를 발행하여 할 수 있었다. 여하간에, 일리노이-미시간 운하는1848년 4월10일 드디어 완공되었다. 평평한 지역에서 96마일을 뚫는 운하 공사가 12년이나 걸렸다. (*저자 주: 참고로, 1825년에 개통한 이리 운하 (Erie Canal)는 330마일을 8년만에 완공했다.)
I-M운하를 통한 교역의 시작은, 4월 16일 뉴욕을 출발한 여객선 General Fry 가 이 운하를 통해 뉴올르리안스로 향했고, 곧 이어 4월 23일 화물선General Thornton이 뉴올르리안스에서 싣고 온 설탕과 다른 곡물들을 시카고에서 버팔로로 향한 스팀선박에 옮겨 실었다. 물론, 당시 일리노이 출신 연방 하원의원인 링컨(Abraham Lincoln)이 연방 의회에서 이 운하 개통 기념 공식 연설을 하였다. 이렇게, 이 운하는 인구 이동 (특히 뉴욕에 도착한 유럽 이민자들)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목재와 공산품을 서부로, 중서부와 남부 내륙에서 생산된 곡물을 미 동부와 유럽으로 유통시키며, 시카고를 진정한 뉴욕 시와 뉴올르리안스를 물길로 잇는 “교역의 교차로”되게 하였다. 이 운하 개통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 당시 중서부의 최대 교역 도시였던 세인트루이스였다. 운하 개통 첫 해에 이 곳의 곡물 거래가 전년도의 반 토막이 되자, 이 운하를 통해 시카고의 오물이 세인트루이스까지 내려온다며 연방 법원에 소송을 냈으나 패소하였다.
2. 철도 서비스 개시
1848년 가을까지 시카고에는 철로 (railroad track)가 전무했다. 그러나 그 10년 후인 1857년에는 하루 100대의 기차가 드나들어 시카고가 미국의, 아니 세계의 철도의 중심지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카고에 철도를 끌어 들인 일등 공신은 단연코 초대 시장 옥덴 (William Ogden)과 상원의원 더글러스 (Stephen Douglas)라고 하겠다. 이들은 철도의 경제성과 철도와 운하의 시너지 효과에 대하여 당시 10,000여명이 모였던 1847년 River & Harbor Convention (*저자 주: 이것이 시카고를 컨벤션의 도시로 만든 효시)에서 열심히 설파하였다.
그래도, 운하가 개통되었는데, 왜 철도가 필요하냐며, 시카고 시의회 --실제로는 당시 시카고의 유지들--의 철도 반대는 거세었다. 이들은, 시카고 시내에 놓여질 철로 주변에는 철벽을 치고, 그 당시 시카고 시의 서쪽 끝인 킨지와 할스테드 (Kinzie & Halsted 길) 기차역 까지의 임시 철로 (선박으로 운송되어온 기차를 운하에서 철도역까지 운송한 후에는 철거)만을 허가해주었다. 그래서 시카고 지역의 첫 철도 서비스는 킨지/할스테드 역에서 서쪽으로 10마일의 철로에서 이뤄졌다. 1848년11월20일 12년 된 나무를 연료로 사용한 기차 (Pioneer)가 몇 명의 유지들을 태우고 킨지/할스테드 역을 떠나 지금의 오크팍 근처에서 밀 (wheat)과 가죽 모피를 적재하고 단 시간 내에 다시 시카고로 돌아온다. 그리곤 곧장 같은 길을 왕복하며 대기하고 있던 수십 대의 웨건에 적재된 물품들을 실어 나른다. 갈레나 & 시카고 유니온 철도회사 (Galena & Chicago Union Railroad Co.) 의 쾌거(?)였다. 이 신속하고 효율적인 물품 운송을 본 시의회가 허겁지겁 시내의 철로 공사를 허가해 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물품운송에 있어서 철도는 첫째, 운하보다 운반 거리를 단축할 수 있었고 적재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편리하고, 둘째, 일단 철로를 설치만 하면 되어서, 시장 지역이 극대화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별로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시카고 지형과 철로 건설은 찰떡궁합인데, 더글러스 상원의원 (Stephen Douglas)의 노력으로 시카고가 미국의 동서를 잇는 철도의 교차점이 되었고, 철도와 운하의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되어 시카고는 미 중서부의 최대도시가 된다. 때마침, 멕시코 전쟁에서의 승리로 텍사스, 캘리포니아, 워싱톤 지역을 쟁취, 현재의 미국의 국경이 확정되니 운하와 철도를 한데 묶은 시카고의 교역의 중심지 입지는 탄탄대로를 걷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
여기에 더하여, 철도와 운하를 통해 교역되는 물품이 생산지와 철로-운하 역을 어떻게 왕래할 수 있는 가를 가늠할 로칼 도로 상황의 개선이 있었다. 시카고 주변의 농장에서 생산된 물품들은 웨건에 실려 시카고의 철로-운하 역 (depot)에 운송되었다. 동부의 공산품도 웨건에 실려 주위 정착자들에게 팔려 나갔다. 1848년 이전 시카고 주위의 주요 도로는 온통 진흙 (mud) 길이었다. 과장이겠지만, 그 당시 시카고를 방문했던 당대의 사상가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은 시카고에서 조금만 잘못 발을 디디면 어깨 높이의 진흙 구덩이에 빠진다고 했다. 아무렴,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시카고 상점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진흙 길의 웨건 출입이 무척 힘들었던 듯 싶다. 1848년 4월 운하가 개통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이 진흙 길에 나무가 깔리기 시작한다. 소위, 나무 하이웨이 (Plank Roads), 혹은 턴파이크 (*편집자 주-Turnpike: 유료 고속도로, 혹은 통행세를 받는 문) 가 생겨난 것이다. 한 예가 현재의 밀워키 길이다.
운하와 철도에 나무하이웨이까지 갖추었으니 교역의 중심지, 시카고의 성장은 그야말로 ‘따 논 당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