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언 변호사>
예수를 믿든 신의 백성이 되든,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 목구멍으로 넘길 음식을 위해 처절히 일해야 하는 것에는 달라질 것이 없다. 고상한 예술과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제 아무리 세계최고의 제국 로마라 할지라도 아주 일부 사람에게만 허락된 큰 사치일 뿐이다. 신이 선택한 바울도 살아 생전 그의 생계를 위해서 텐트를 만들어야 했다. 물론 사역 후반기에는 그를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유력 인사들이 생겨, 투옥되었을 때를 제외하면 전도와 선교 업무를 풀타임으로 할수 있게는 되었지만.
나 역시 해방 노예로서 골로새의 변호사 이레니우스를 대신하여 그의 귀찮은 서류일을 해내야 한다. 요즘 들어 이레니우스의 평판이 나빠지고 있다. 그의 일이 줄어들면서 내 수입도 줄고 있다. 걱정하던 아내는 이제 겨우 육아에서 해방된 얼마 안되는 시간을 써서 물건을 사고 팔아 푼돈을 벌기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나의 기도는, 예수의 도가 더욱 잘 전해지도록 바랄 때보다, 부부가 하는 일의 형편이 나아져 미래 걱정을 덜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구할 때 더욱 절실하다.
빵 5개,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은 살아 생전 제자들이 제일 많이 얘기한 예수의 기적이었다. 그럴만도 하지. 그 많은 사람이 먹을 것도 없이 구원의 소식을 찾다가 광야에서 경험한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이었겠는가. 지붕을 뚫고 친구의 병상을 예수에게로 내린 친구들의 이야기도 결국은 인간에게 있어 실제적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으로 와 살고간 신은, 그의 아담에 대한 저주로 평생 땀을 흘려야만 하는 인간의 비루한 현실을 보고 불쌍히 여겼을 뿐, 그 고통을 근본적으로 걷어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썩어져 가는 땅의 것을 보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라 가르쳤다. 인생은 그렇다면 미래의 해방을 바라며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나그네길이란 말인가. 단지 그 나그네가 도착할 고향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조금 평안할 뿐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