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년 Beer Riot 일어난 클락 & 랜돌프. 왼쪽 하단에 5개의 라거 비어 saloon이 있다
1855년 당시 시카고 시장, Levi Boone
1855년 Riot 포스터
<김 신 교수>
우리는, 지난 세 번의 칼럼 “시카고역사이야기 #5, 6, 7”을 통해 일리노이 주정부가 1837년에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을 연결하는 ‘교역의 교차로’라는 꿈을 이루고자 출범시킨 시카고가 그 11년 후인 1848년에 드디어 모던 도시, 교역의 교차로로의 힘찬 도약을 시작했음을 보았다. 시카고에게 ‘신의 한 수’였던 1848년은 미국에게도 아주 중요한 해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북미주 내륙에서의 미국 영토가 확정되어 마켓이 아주 빠르게 커졌기 때문이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인구의 움직임과 교역이 극대화되는 1848년에 때맞춰 교역의 교차로에 필요한 일들이 시카고에 일어났으니, 1848년은 정녕 ‘신의 한 수’임에는 분명하다.
또한, 1840년대는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미국에 도입되고, 유럽인의 이민이 급증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1848년 이후 시카고는 미국 역사 (또한,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동시에, 시카고는 미국의 산업화, 그것도 규제되지 않은 시장 자본주의 (unregulated market-oriented capitalism)의 실험장이 되어, 온갖 자본주의 산업화의 문제점을 어느 도시보다도 먼저, 그리고 더 오랫동안 직접 살아나가게 된다. 시카고가 ‘극과 극’의 도시 (city of extremes)’ 된 것이다.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 (population)와 늘어난 인구의 원활한(?) 생활을 위한 인프라 (infrastructure)의 마련을 살펴보려 하는데, 오늘은 시카고의 인구 증가를 중점적으로 본다.
우선, 통계로 본 인구 증가를 보자면, 시카고는 1837년3월4일에 3,820명의 인구로 시 (city)가 되었다. 그해 말 조사는 4,170명, 1840년 US센서스에는 4,470명, 1850년에는 29,963명, 1860년에 112,172명, 1870년에 309,000명, 1880년에505,185명, 1890년에 1,100,000명을 기록했다. 시카고는는 1840년에 미국에서 9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으며, 1860년에는 9번째 (센트루이스는 8번째), 1870년에는 5번째 (센트루이스 4번째), 1880년에는 4번째 (센트루이스 6번째), 1890년에 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된다.
이렇게 상주 인구가 팽창하였는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시카고로 유입되었는가? 크게 분류하면 두 부류였다. 첫째 부류는 미국 내의 타주 (주로 동부)에서 이주한 미국인들이었다. 이중에는 물론 새로운 곳에서 아메리칸드림 (American dream)을 성취하기 위해 이주한 사람들도 있고, 범죄와 사회적 문제가 있는 과거를 감추고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또, 어느 정도 자본을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지만, 맨손으로 이주한 백인들도 있어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시카고에 모이게 된다. 이들은 조금 후에 유입되기 시작한 이민자들과 구별하여 “네이티브 (native)” 라는 배너 (banner)아래로 뭉치게 된다. 둘째 부류는 유럽의 이민자들—특히, 독일, 아일랜드, 그리고 적은 수의 노르웨이와 스웨덴 이민자들이다. 시카고가 이민자들에게 매력적이었던 초기 요인은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공사로 인한 일자리 창출이었다. 1836년도부터 이민이 몰려오더니, 1843년에는 시카고 인구의 30%가 외국 태생이었다. 이때 이민자 (foreign born)는 동부에서 얼마간 살다가 시카고에 온 자들과 이민을 곧 바로 시카고로 온 이들을 모두 포함한다. 여하간, 1857년 어느 하루에는3,400명의 새 이민자가 기차로 시카고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고, 1860년에는 시카고 인구의 54%가 외국 태생이란 기록도 있다. 1860년에 되면 시카고 인구의 80%가 이민자, 또는 이민자의 자녀—소위 말하는 "foreign stock”--였다.
*사족으로, 이때의 이민자는 이민자들과 이민자의 자녀 (미국 태생을 포함)을 다 포함한다.
1848년 이후에 이렇게 급속도로 인구가 팽창하자, 시카고의 사회 구도는 “미국 태생 vs. 이민자”, 그리고 “미국 태생=자본가 vs 이민자=노동자”로 형성되어 어떤 이슈라도 “네이티비즘 (nativism)”-- 미국 태생의 백인과 이민자를 구별, 차별하는 태도--의 프리즘을 통해 보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도덕적 이슈 (moralistic issue)로 재포장되었다. 이에 더하여, 어느 이민 그룹이나 시카고에서는 자기들만의 주거 지역별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살았기에 --예: 가장 많았던 독일인은 Old Town, 아이리시는 Bridgeport (Canalport), 스칸디나비은Near North-- 각 선거 구역 (ward)마다 인종 구성 (ethnic composition)에 따라 이슈가 달리 포장되어 제시되었다. 한마디로, 시카고는 제 각각 다른 특징을 가진 커뮤니티들 (distinct communities)이 모인 곳이지, 한데 어울러져 사는 멜팅팟 (melting pot) 도시는 절대 아니었다.
이민자들이 시카고에 미친 직접적 영향 몇 가지만 짚어본다. 첫째,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도시 노동자였기에 거의 모든 생필품을 마켓에서 구입하였다. 따라서 시카고의 상인들에게 이민자들은 이상적인 소비자 (ideal consumer)였다. 둘째, 그런데, 이때의 이민자들에게 아일랜드 맥주나 독일 맥주는 필수식품에 들어가는데, 미국인들은 이를 부도덕한 음주로 여겨 가게에서 팔지 않았다. 1839년에 2명의 이민자가 미시간/시카고 애비뉴에 맥주 양조장을 열게 된 사연이다. 셋째, 이 시기의 이민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카톨릭이어서, 이들 이민자들로 인해 시카고의 카톨릭 인구가 급증한다. 1836년까지 시카고 카톨릭 교구는 프랑스계 (French-American) 사제들이 관장하였는데, 곧이어 독일계 사제들이 들어왔고, 이어서 아일랜드계 사제들이 주류가 되었다. 이때의 시카고의 이민자들은 무디 (D.L. Moody) 같은 복음주의자 (evangelists)들이 기존 백인, 즉 자본가들을 지지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부흥 운동에는 아주 냉담하였다. 넷째, 카톨릭 이민자들이 많아지니까 자연히 반카톨릭, 반이민의 사회풍조가 시카고 사회에 뿌리 내리고,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1855년의 “Lager Beer (독일 맥주) Riot”을 한 예로 살펴본다. 1854년에 “Know-nothing Party” (American Party)가 금주 운동 (temperance)과 반카톨릭(=반이민) 감정을 교묘하게 접합시켜, 시카고 시장과 시의회를 장악한다. Levi D Boone이 시장이 되면서 첫번째로 한 일이 주류판매면허비 (liquor license fee)를 600배 인상하고, 일요일에는 술 판매를 금지시킨 것이었다. 이민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날은 유일하게 일요일이었고, 또 술집 (saloon)에 모여 술 한, 두 잔 하면서 지역사회 교제 (community building)도 하고 정보와 서류들을 서로 살펴 주었기에, 이민자들에게 일요일의 술 판매 금지는 큰 타격을 주었다. 아이리시 지역에서는 많은 싸롱들이 두꺼운 커튼을 달고 비밀리에 영업하는 불법 선술집 (speakeasies)으로 장사를 하기도 하였지만 일요일 술 판매금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불만은 조금 여유가 있던 독일인, 특히 개신교도 (protestants)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855년 4월21일 일요일에 영업 금지 조례를 지키지 않은 술집주인200명 --주로 독일인 (*저자 주: 왜 주로 독일인이었을까? 흥미로운 질문이나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이 체포 구금되자, 독일인들과 아이리시들이 법원에 몰려가서 이들의 방면을 요구한다. 그 와중에 작은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시카고에서의 첫 번째 시민 소요 사태 (civil disturbance)는 이런 연유로 시작되어 Boone시장의 재선을 좌절시키며 시카고 역사 상 흔치 않은 이민자들의 정치적 쾌거 (?)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