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2 23:11

나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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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사마리아인.jpg

 

 

 

<김 신 교수>

 

새벽예배 멀리 캐나다 친지가 보낸 카톡을 읽었다. 우선 카톡의 일부이다:

 

큰스님과 작은 스님이 함께 불경을 구하러 천초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때 둘의 앞에 작은 하나가 있어 스님과 작은 스님이 강을 건너려는데 아낙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스님이 아낙을 업고 강을 건너 주려 한다.

스님이 아낙을 업고 강을 건너서 아낙을 내려주자 아낙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사라진다.

 

둘은 말없이 걸어 가다가 작은 스님이 스님에게 묻는다.

"스님은 어찌하여 수련하는 몸으로 아낙을 등에 업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수행자의 올바른 자세입니까?"

 

스님은 작은 스님에게 말한다;

" 아낙을 아까 내려놓았는데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있구나!"

 

이미 지나간 일에 목숨을 거는 지금의 현실을 정면 돌파할 배짱이 없다는 뜻일 터.

스님은 아낙을 업었다는보다 불경을 찾아 천초국 가는 것이 급했고, 작은 스님은 큰 스님이 아낙을 업은 것만 신경 쓰고 있다.

 

 

처음 든 내 생각은 작은 스님은 불자의 행동규범 (율법규율)에만 얽매인 . 아니 넘을 없는 작은 그릇! 문득, 사람이 안식일 준수를 위해 있는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가? 물으신 예수님이 생각났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언젠가 읽었던 비유에 대한 이현주 목사님의 글이 생각났다. 이현주 목사님이 작은 교회 목회하실 , 선한 사마리아비유를 설교하시며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도왔을까 물으셨다.  설왕설래 끝자락에 초등학생이 "혹시 강도 만난 자가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이 아는 사람(혹은, 친구) 아니었을까요? 죽어가는 친구를 살리는 것은 당연하지요.” 했다.

 

나의 친지경계 넘어 사는 어려운 이웃들이 (우리) 친구로 여겨지는 마음. 그래서 나누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는 , 그리고 그들을 살려보려는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이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우리) 자신이 간구하고 갈급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을 뿐인) 엘리야로 극심한 가뭄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게 하신 것, 이것이 하나님의 큰 뜻이 있었구나,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열왕기상 17)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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