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역사이야기 <10>: 시카고에게 “덩굴 쨰 떨어진 호박” 남북전쟁 (1)

by skyvoice posted Aug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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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

 

시카고역사에서 1848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중요한 해 (year)를 꼽으라면 1871년이

. ? 1871108일 그 유명한 시카고대화재가 발생했고 대화재 복구를 통해 시카고는 미국의 제2의 대도시 (the Second City)의 자리를 100년간 지켰기 때문이다. 시카고에게 1871년 대화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도 시카고역사를 1871년 대 화재 전 (pre)과 후 (post)로 구분하여 보는 이들이 많다. 지난 5번의 컬럼을 통해, 우리는, 마치 신의 축복같이 교역의 교차로에 필요한 일들이 1848년 한꺼번에 일어난 것과 그 이후 급속히 성장하는 시카고의 1850년대와 1860년대를 살펴보았다. 당연히, 시카고대화재를 알아보는 것이 다음 순서일 것 같지만, 그 이전에 시카고에게 뜻밖의 횡재가 된 남북전쟁 (1861-1865)을 살펴보려 한다. 남북전쟁을 겪으며 시카고의 산업 (특히 제조업)이 시작되고 활성화되어 시카고는 교역의 도시를 넘어선 진정한 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이다.

 

잘 아는 대로, ’남북전쟁이 없었다면 현재의 미국 (USA)이 없었다고 볼 정도로 남북전쟁은 미국을 모든 면에서 송두리째 흔들어 변화시킨 Civil War (내란) 이었다. 내란이란, 하나의 나라가 최소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지고, 그것이 무력충돌로 이어진 한 국가 안에서의 전쟁이다. 남북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 경제적 풍조와 배경과 이유, 그리고 결과와 영향은 도저히 여기에서는 살필 수 없어, 오늘은 남북전쟁의 실제 전개 과정만을 살펴본다. 그것도, 아주 피상적이고 간략하게.

 

일리노이 출신 연방하원의원을 딱 한 번 지냈던 링컨 (Abraham Lincoln)1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취임식 (186134)을 하기도 전인 18601220일에 남부 7개 주 (states)가 미합중국 (USA)에서 탈퇴하고, 남부연합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the Confederacy)을 세워 독립을 선포한다. 무력 충돌은 거의 4개월 후인1861 4 12일에 연방 소속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포트섬터 (Fort Sumter)를 남부 연합이 함락시키며 시작된다. 이어진 링컨 대통령의 군인 동원 요청을 계기로, 또 다른 남부4개 주가 연방을 탈퇴, 남부 연합에 가담하여 남부 연합은 11개 주로 늘어나며 향후 4년동안 미 전국이 전쟁의 폐해를 호되게 치렀다. 산업화, 인구 수와 경제력에도 단연코 연방이 우세했고, 군사적으로도 아주 초반을 제외하면 남부 연합은 열세를 면치못해 1865 4 9일 버지니아의 아포마톡스  (Appomattox)에서 남군의 항복이 있기까지 남부 지역은 완전 초토화되는 수모를 겪었다.  남군의 항복 일 주일만에 링컨이 저격 당해 사망하는 등 남북전쟁은 역사적 보물 단지로 불릴 정도로 흥미진진(?)한 일화들로 넘쳐나고, 링컨대통령, 로버트 리와U.S. 그랜트 장군 등등 유명 인사도 많고,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등 감명적인 연설과 특히 사진 기록이 아주 많다.

     

미국역사에 가장 획을 그었던 남북전쟁이 시카고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마디로, 시카고에게  남북 전쟁은 예상치 못했던 덩굴 굴러 호박 자체였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전쟁 피해는 별로 없이,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시카고의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중서부의 최대 도시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있었기 때문이다.  시카고에게 남북전쟁이 뜻밖의 횡재 되었던 이유는: (1) 시카고의 위치가 남북전쟁의 실제 전쟁 지역과는 많이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전쟁 피해는 없었고; (2) 시카고 경제에  남부 지역과의 교역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에, 전쟁 발발로 인한 교역량 감소가 크지 않았을 아니라; (3)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물품 운송 수단과 교역 시스템이 완벽하게 자리잡고 있어 북군의 전쟁 물자 조달에 적격이어서; (4) 전쟁 수행을 위해 연방정부 (Union)에서 시카고에 직접 쏟아 부은 재정이 엄청났으며;  (5) 전쟁을 계기로 시카고의 제조업과 인구가 급팽창한 점을 있다. 

 

*사족 두 가지: (1) 남북전쟁에 종군한 시카고 출신은 약 26,000명이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민자였다. 일반적으로 이민자들은 이민해온 나라에서의 전쟁에는 참여를 기피하는데, 시카고에서는 웬일로? 시카고의 이민자들은 미국 태생의 징집 의무를 (물론 돈을 받고) 대리 복무를 했다고 한다. 이민자들의 대리 복무를 주선하여 주고 돈을 번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카고에서 돈의 위력은 대단했다.

(2) 일리노이 출신 연방상원의원 더글라스 (Stephen Douglas)의 소유지인 시카고의31-33가와 Giles & Cottage Grove 12,000명의 포로를 수용한 큰 남군포로수용소 (Camp Douglas)가 있어서 주말이면 시카고 주민들이 남군 포로들의 남루한 모습을 보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이를 수치로 여긴 남부연합의 데이비스 (Jefferson Davis) 대통령이1864년 스파이를 보내 탈옥을 시도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연방상원의원과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과 대결하였던 더글라스이어서, 혹시 정적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의아 했는데, 절대 그렇지는 않았다.  선거에서 링컨의 경쟁자였던 더글러스는 선거 후에는 링컨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더글라스는 남북전쟁 발발 두 달만에 질병으로 사망해서, 애석함을 안겨 주었고 위에 언급한 자신의 소유지를 연방에 희사하였다.

 

 남북전쟁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연방정부가 시카고 경제에 쏟아 부은 예산은 얼마나 되었을까? 가지 예를 들어보자.  군인들의 피복마련에 1861년에  $2 50,  그리고1863년에는 1 200만불을 투입했고, 군화 (구두) 구입에 1861년에 250만불, 1863년에는 1400만불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군인 훈련 다른 일차적 전쟁 비용도 아주 많이 쏟아 부었지만, 간접적, 부차적인 자원 규모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이러한 연방정부 (북군) 지원으로 시카고의 제조업은 우후죽순으로 창업했고 성장한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시카고의 제조업체는 단연코 밀추수기계 공장인 McCormick Works이다.  시카고의 (소맥)교역량이 1861년에 3000 부셸 (bushel)에서 1863년에 6500 부셸로 늘어난 배경에는 맥코믹 추수기계가 있었다. 북군의 국방장관 Stanton 맥코믹추수기가 없었다면 북군이 이길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맥코믹공장은 남북전쟁 이전에 있었던 것이지만, 남북전쟁을 계기로 시카고의 제조업이 아주 다양하게 확장되었으며, 지역에서 유입된 공장과 새로 시작된 공장이 아주 많이 늘어나면서, 인구도 급증하고 지리적 팽창도 이뤄졌다.  인구가 늘어나니, 건물에 대한 수요도 커져서, 목재산업도 팽창하였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남북전쟁을 계기로 가장 유명하게 시카고의 사업체는 유니언 스탁야드 (Union Stockyard)이다.  이는 다음 번에서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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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와 1860년대의 미국의 철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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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코믹 공장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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