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봉주 편집장>
매년 8월 첫째 주면 시카고에 도착하던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여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 필라델피아, 그리고 뉴욕으로 세 달 동안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하는 3A Project (Admit, Apology, Accompany): Bike for comfort women의 자전거 청년들입니다. 아직도 그들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사과하지도 않아 할머니들이 한을 품고 한 분씩 한 분씩 세상을 떠나시니 더 늦기 전에 전쟁 통에 당했던 약한 이들의 아픔을 세상에 알리고자 그 먼 길의 대장정을 페달에 싣고 달리는 이들입니다. 제가 이들을 맞게 된 건 두번째 해부터, 마침 제가 일했던 시카고한인문화회관을 방문했던 두 자전거 청년들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들과 함께 시카고 지역의 여성, 이민단체들과 함께 위안부 기림 수요집회에 참석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올해에는 여섯번 째 청년들이 오게 되었지만, 올해에는 코로나 펜더믹으로 아쉽지만 자전거 횡단팀이 못 오게 되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시카고 지역에서는 KAN-WIN을 비롯, 관련 단체들이 줌으로 온라인 행사를 했고 8월 14일 위안부 기림일에 예전에 했듯이 "평화의 소녀상"을 옆에 두고 함께 앉는 퍼포먼스를 하기로 했습니다. 소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요. 소녀상을 실제로 보며 함께 앉아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소녀에게 놀랐고 더 미안해 지더군요. 아무렇게나 잘라진 단발머리, 한을 품고 꼭 쥔 두 주먹, 그리고 맨 발. 내 딸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그토록 엄청난 일을 겪었으니. 그리고 전쟁과 함께 전리품처럼 죽여 버려져야 했던 그들의 운명. 다행히 죽음에서 탈출하거나 구출되었다 하더라도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고향에서, 가족으로부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그 한많은 세상을 또 한을 품고 살아야 했던, 그때 소녀에서 삶이 딱 멈추어진채 지금은 할머니가 된 그들.
어렸을 때 시골 할아버지 댁에 놀러갔을 때의 기억이 납니다.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수다를 떨다 어떤 아줌마가 지나가자 서로들 수군수군 대던 일. 그 때도 또렷이 기억나는 말이, “정신대 갔다 온 저 화냥년.”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피해를 당한 것인데, 왜 같은 여자끼리 그의 아픔을 이해해 주고 감싸 안아주지 못할 망정, 더러운 것 본 마냥 그리고 죄인 취급할까, 어린 나이에도 이상히 여기며, 저는 외톨이가 되는 그 아줌마를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인식이 많이 달라져 어엿하게 정신대나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이들의 빼앗긴 인권을 되찾아 주고자 발벗고 나서는 여러 단체들이 있습니다. 저도 저의 작은 힘이지만 보태고 싶어 워싱턴에 있을 때에 “정대위” (정신대 문제 대책 위원회: WCCW)에 소속되어 당시 회장이었던 이정실씨와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평통위원으로서 봉사하던 때에 만난 달라스의 “잊혀지지 않는 나비들 (Unforgotten Butterflies)” –*저자 주: 달라스의 “잊혀지지 않는 나비들 (Unforgotten Butterflies)”은 정의연이나 나비연대, 나눔의 집과는 별개로 달라스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단체임--로 활동하는 박신민씨와는 정대위에서, 그리고 평통 등, 위안부 영화, “귀향”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을 위해 영화 상영하는 일을 돕고 위안부 알리는 일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시카고에서 오봉완 교수님, 루시백 박사님을 만나고 알게 되어 함께 활동하며 언제인가 시카고에도 "평화의 소녀상"을 앉히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라가 약할 때에, 그리고 전쟁에서 패한 나라면 으레 피해를 입게 되는 계층은 사회 계층에서 가장 약한 계층인 여성과 어린이들이게 됩니다. 그들이 원치 않았던 전쟁, 그렇지만 그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롯이 그 패배의 피해를 당해야 하는 약자들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그래서 전쟁의 피해를 받는 이들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전쟁과는 상관없이 인권을 유린 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폭력도 없어지길 바랍니다.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서로가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 지켜 줘야할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가 함께 이 지구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에게도, 그리고 식물과 자연에게도 똑같이 귀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창조하신 그때처럼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세상으로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려야지요. 그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하나님이 “참 잘하였다, 나의 소자야”라고 칭찬 받고 싶지 않으세요?
잊혀질 뻔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짓밟힌 인권, 그리고 그 한을 풀어드려 이제 편안히 나비 되어 좋은 세상으로 올라가 그 세상에서는 이 세상에서 살지 못했던 행복한 삶 영원토록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하며, 저는 “I weep with comfort women” (나는 그들과 함께 운다.)라는 말을 하며 금년의 위안부 기림의 날에 소녀와 함께 소녀의 의자에 앉았습니다. 내년에는 이 코로나를 물리치고, 자전거 청년들이 미국에 와 함께 수요집회에 참가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