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역사이야기 <12>: 1871년 시카고 대화재 (1)

by skyvoice posted Sep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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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

 

오늘부터, 시카고 역사에서 큰 재해 (The Conflagration)로 불리며 시카고의 역사를 (Pre)과 후(Post)”로 가르는 그 유명한 1871년의 시카고 대화재를 살펴 보겠다.  시카고 대화재 1871108일 일요일 밤 9시에 시작되어 화요일 1010일 새벽, 그러니까 발생30여 시간 만에 진화된 화재이다.  19세기의  미국 대도시들은 모두 대형 화재를 겪었다: 1835년 뉴욕, 1845년 피츠버그, 1866년 필라델피아, 등등. 중서부의 최대도시로 급격히 성장하던 시카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실, 1871년 이전에도 시카고에서 “Fire!” 하면”so what?”이라 할 정도로 화재 --그것도 큰 지역을 전소하는--가 빈번하였다. 빈번한 대형 화재 덕분에, 그 당시 시카고 소방국은 미 전역에서 최첨단 소방 시스템 --전 시가를 커버하는 알람 시스템, 185명의 전문 소방인, 17대의 스팀엔진 ()소방차 등, 1871년의  예산만 해도  $400,000 --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 왜 1871년의 화재를 그리 중요하게 여길까? 그야 물론, 여기저기서 조용히 시카고, 이젠 끝났음!” 이라 할 정도로 시카고 시의 경제, 정치의 초 중심 지역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71년의  대화재 발생 장소, 경위, 진화와 복구 과정을 자세히 살펴 보노라면 19세기 미국의 규제되지 않은 시장 자본주의 경제 체재가 주도한 가파른 도시 성장의 민낯이 보여져서 꽤나 흥미롭다.

 

우선, 1871년 대화재 직전의 시카고를 극심한 부의 불균형 (Income/wealth inequality)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1870년 센서스에 따른 시카고 인구는 309,000명이었고  그중 75%가 극빈곤층이었다.  이들의 대다수가 이민자였고, 더하여 3,000명 가까운 흑인과 약간의 native 백인이 포함되었다. 대화재 때 전소된 시카고 시청과 법원 (court house) 서류 중에 요행히 살아 (?)남은 1849년 세금보고서를 보면, 첫쨰, 시카고 가장 (head of families) 74%가 소유 토지, 상업적 부 (commercial wealth)가 전혀 없는 극빈자 (destitute)였다. 둘쨰, 1%의 부자가 52%의 시카고 부 (wealth)를 소유했는데, 이는 그 당시의 미 동부 도시들보다도 10-15%가 높은 수치였다. 셋째, 10% 부자가 94%의 부를 소유했으며, 넷쨰, 20%의 부유층이 99%, 그리고 25%가 모든 시카고의 부를 차지했다.

 

그러니까, 1860년대 말, 1870년에는 거의 200,000명의 시카고 인구가 황폐하고 낡은 판자집에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빈곤층이 집을 소유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한 집의 대지 ( lot)로 구획된 곳에 앞, 뒤로, 또 아래, 위로 급히 지은 판자집에 세 들어 살았다고 한다. 이들이 따로 모여 살던 지역이 있기는 하였지만, --: Maxwell St., Conley’s Patch, Bridgeport, the Sands--  워낙 절대다수 (2/3)가 극빈층이니 시카고의 어느 지역이든지 무직자, 일용노동자, 중산층, 부유층이 어느 정도 모여 (?) 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1860년대 말부터 부자들의 불쾌한, 그리고 해로운(noisome) 도시에서의 탈출이 시작되기도 했고, 시내 부유층 지역에 한정된 녹지대 (greenbelt of parks)’의 건설과 공공 서비스 마련이 박차를 가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 1871 10 8일 일요일 밤 9, 시카고 인구 밀집 지역의 거의 남쪽 끝인 18가 근처의 De Koven St.에 있는Patrick (Cathleen) O’Leary 소유의 작은 헛간에서 시작되었다. 어떻게 시작되었나? 어느 누구도 모른다. 흔히 알려진 Mrs. O’Leary가 젖을 짜던 중에 소가 램프를 발로 차면서 불이 시작됐다는 것은 꾸며낸 일이라고 그 기사를 쓴 Michael Ahern1900년 동료 기자에게 고백하였다. 그 기사로 인해, 화재가 난 것도 모르고 헛간 남쪽 길 건너 집에서 자고 있던 Mrs. O’Leary는 후에 집도 빼앗기고 험한 꼴을 당하다가 1895년 알거지로 사망했다. 대화재에 무사했던 그녀의 집터에는 후에 시카고 소방 학교가, 지금은 소방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소방국의 최신 알람 시스템은 뭘 했지?

 

일요일 저녁 9시가 조금 넘어 시청 위의 소방 타워에서 시카고를 살피던 watchman Schaffer Canalport Ave.Halsted St.의 시카고 강가에 쌓아 둔 석탄 더미에서 불이 나는 것이라 판단하여, 아래층의 화재 경고 알람 시스템 담당 Wm Brown에게 342번 키를 누르라고 했다.  곧바로 시청의 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소방 요원들이 투입되었는데 바로 몇 분 후에 Schaffer는 자신의 화재 발생 지역 판단이 오판임을 알아, 다시 319번 키를 누르라고 하는데 Mr. Brown이 거절하는 통에, 45분 정도 화재 진압이 지연되어 시카고 대화재는 이때의 브라운씨의 중대 실수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여하간, Mrs. O’Leary는 카톨릭 아이리시 이민자이고, 그의 집은 남부 지역의 악명 높은 빈민가 Conley’s Patch에서 시카고 강 건너에 있었다.  바로 그 전날 Conley’s Patch의 큰 화재로 소방관들이 거의 밤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O’Leary 헛간에서 시작된 불은 한 시간도 못되어 헛간 북쪽의 판자집 촌을 몽땅 불사르고는, 시속 20마일에서 시작되어 60마일 속도로 늘어난 강풍의 힘으로 동쪽과 북쪽 방향으로 거세게 번져 가면서, 커다란 불똥이 시카고 강에도, 근처 상가, 공장, lumber yard에도 떨어져서 새로운 화재가 시작되곤 하였다. 이때의 불똥은 1,000피트 넓이에 100 피트 높이의 “moving fire wall”이었다.  월요일 오전 7시가 되면 시의 waterwork이 타버린 통에 소방전에서 물이 나오지 않아, 소방차들이 미시간 호수에서 물을 릴레이 하면서 진화에 힘썼다. 거센 화염은 월요일 하루 종일 계속되어 시카고의 중심 지역을 거의 다 태우고, 월요일 저녁에 내리기 시작한 비 (rain)의 도움으로 화요일 (1010) 새벽에 진화된다. 월요일은 대낮에도 검은 화염으로 하늘이 어두컴컴했다고 한다. 피해 규모를 보면, 전소 지역의 규모는 1마일 넓이에 4 마일 길이 (4 square mile) 200에이커가 넘는 지역에 이른다. 재산 손실은 시카고 시 전 재산의 1/3$190-250 million에 달하고, 화재로 인한 이재민은 사망자가 --아무도 모르지만--300명으로 추정되고, 시카고 인구의 최소 50%가 당장 의식주 걱정을 하는 이재민이었다고 한다. 인구의 1/3 100,000명이 홈리스가 되었고 전소된 주택을 하나에 10피트로 잡아 늘어놓으면 100마일이 넘었고, 전소를 면한 주택도 대다수가 입주 불가의 상태가 되었다. 전소된 빌딩이 17,450 - 이중에는 시청, 유명한 상점, 극장 건물, 화이트 삭스의 구장, 중앙우체국, 트리뷴 타워, Board of Trade, 4장로교회 등 셀 수 없이 많은 시카고를 빛냈던 (?) 건물들이 포함되었다.  전소된 도로가 73마일, Sidewalk 120 마일이 되었으며, 2,000개의 가로등이 파괴되었으니, 가히, 사상 초유의 대화재였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이 큰 재해 (conflagration, inferno)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증거가 이때의 일기와 기록들에 나타나 있는데, 읽기가 힘들 정도로 비참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대화재 기록 사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사진이 보편화되었나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께는 남북전쟁의 사진 기록은 넘쳐난다는 점을 알려드린다. 절대 다수가 이 화재에서 모든 소유를 잃어버렸지만, 엄청 운 좋은 이들도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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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재 직전의 시카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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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타운의 State & Madison St.의 대화재 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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