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언 변호사>
사도 요한이 마가와 마태, 그리고 누가의 예수 복음서가 회람되는 동안에도 침묵하다가 긴 공백 뒤에 내놓은 복음서에는 다른 세 복음서에는 빠진 예수의 가르침과 에피소드들이 많이 담겨 있다. 제자들이 모두 순교하고 예수와 함께 갈릴리를 걸었던 대부분의 이들이 사망한 지금까지도 요한은 살아 교회의 큰 어른으로 남아 있다.
그가 복음서의 마지막에 소개한 에피소드는 원래 유명하다.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허탕치던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 그물이 끊어지도록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고 떡과 생선을 먹인 뒤 베드로에게 세번 반복하여 “내 양을 먹이라”며 예수가 잡히던 밤 세 번의 부인을 만회할 기회를 준 그 일 말이다. 베드로 본인도 생전에 많이 언급하였던 일이다. 그런데 내 눈길을 끄는 건 요한의 기록에 이날 잡힌 물고기 숫자가 정확히 적혀 있다는 것이다. 153마리. 부활한 예수임을 깨닫고 기쁨과 경황 중에 조반을 같이한 제자 중 누가 잡힌 물고기 숫자를 세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허나 요한의 이 사소한 듯 남긴 기록은, 내가 예수를 본적도 없이 그들의 증언에 의지하여 이 도를 믿게 되었지만, 예수의 삶과 부활이 정말 사실이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런데 오늘은 그 유명한 에피소드 바로 뒤에 적힌 기록, 그러니까 요한복음서의 마지막 다섯 구절 (*역자주: 요한복음 21장 20절 이하) 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다. 내 양을 먹이라는 세번 째 부탁 뒤 베드로에게 훗날 고난이 찾아 오게 될 것임을 예수가 예언으로 남기자, 베드로는 뜬금없이 뒤에 서있던 요한을 지칭하며 요한은 그러면 어떻게 될것인지를 예수에게 물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요한이 살아 있든 아니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고 예수가 답한 것을 요한이 기록해 둔 것이 아닌가. 베드로는 요한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감정은 질투심이었을 것이다.
예수 생전 누가 천국에서 첫째냐를 다투던 두 주인공은 분명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본인을 지칭하는 대목에서 이름을 쓰지 않고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 적고 있다. 심지어 이 마지막 기록에서도 요한은 본인을 굳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한 자라 표현한다. 다혈질에 천성이 남자인 베드로와 야심차나 여자같은 요한 사이에 예수를 누가 더 사랑했는지 경쟁하는 듯한 묘한 분위기라니. 노사도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건 복음서의 맨 마지막에까지 자신의 예수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다니. 조금 유치한게 아닌가 싶다가 이내 든 생각. 질투는 사랑의 또다른 이름. 유치함은 사랑에 빠진 이의 큰 특징. 예수의 가르침이 그 무엇보다 다른 건 인간이 아이처럼 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 외로운 세상에 이보다 좋은 소식은 없다.
*역자 주
모나미에서 나온 유명한 볼펜 153 이 있습니다. 모나미 사장님이 성경 요한복음 21장의 잡힌 물고기 숫자를 새로 만드는 볼펜의 상표로 썼다는 말이 있지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예수님 부활 후 잡힌 물고기 숫자는 하나님의 축복, 기적의 의미를 갖게 되어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사업체에서 종종 사용하는 숫자가 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이 숫자가 기록에 남은 것을 의아해 한 것이 재미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없었던 일을 꾸며냈다면 그런 디테일이 가능했겠는지 하는 평가이기도 하네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는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온 수많은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두 제자입니다. 이 두사람이 서로 질투한 것처럼 느낀 것은 오네시모의 상상력의 결과인 듯 합니다만, 요한사도가 노년에 쓴 것임에 분명한 요한복음서에 자신을 예수가 사랑하셨다고 적는 자신감 내지 용기를 보면, 복음서를 고상해 보이도록 끝내는 것보다 곧 만날 예수에 대한 사랑이 더욱더 깊어진 사도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그림 설명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 460X880cm;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소장; 1495-97년; 템페라와 유화로 벽에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