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언 변호사>
로마법이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 애드리비툼(ad libitum). 흔히 줄여서 애드립(ad lib) 이라고 한다. “자의적으로”, 또는 “마음대로”라는 법언이다. 상관 이레니우스 변호사가 얼마전에 골로새 법원으로부터 큰 승소를 얻어냈는데, 만민법 하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소급적용 금지의 원칙을 잘 주장한 덕이었다. 기득권은 사후 입법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ad libitum) 소급하여 박탈될 수 없다는 원칙. 겉으론 정의 실현을 외치지만 현실에서 법학은 대개 가진 자의 도구이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역사의 발전은 기존 체제를 지키는 법학이 아니라 종종 그 넘어를 이야기하는 철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카이사르가 공화정에 대한 대원칙을 지키고자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로마의 찬란한 오늘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로원은 그후로100년이 되도록 왕정 체제를 비판하지만 공화제에 머물렀다면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그저 그런 국가에 그쳤을 것이다.
나는 예수의 혁명적인 가르침에서도 루비콘을 건너는 희열 같은 것을 느낀다. 여호와에게 직접 받은 율법은 유대인에게 말 그대로 신성불가침의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율법의 원래 정신은 퇴색되고 무의미한 관행이 되어 유대인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예수가 안식일의 율법을 일부러 어긴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애드립(ad lib) 이 아니었다면 여호와의 정신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을 수 없었다. 신이 죽도록 피조물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은 신을 인격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이 기이한 믿음은, 오로지 예수의 파격으로 인해 오늘날 제국변방 넘어까지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 내게 곤혹스러운게 하나 있다. 많은 교회들에서 최근들어 이단의 문제가 심각하다. 예수가 신이면서 어떻게 동시에 사람일 수가 있느냐든지.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분법으로만 신앙을 해석한다든지. 사도 바울도 서신에서 경계한 게 여러 번이다. 율법에서의 해방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 각 도시의 가정 교회가 유대 경전과 예수의 기록을 누구나 자유로이 읽게 하다 보니 더욱 그러한듯 하다. 급기야 입장에 따라 성도들끼리 다투기 시작했다. 얼마전 아시아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이 에베소에 모였다. 이런 말이 나왔다. 앞으로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ad lib) 해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직자 계층을 따로 만들고 평신도는 오로지 가르침을 듣게만 하자고. 문득 예수를 심문하던 유대 산헤드린 공회와 골로새 법정이 떠오른다.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 신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 역자주
오네시모의 이번글 제목인 “애드립”은 현재 연극이나 방송에서 대본에 없는 즉흥 연기를 이르는 말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애드립이 라틴어에서 나온 말이군요. 그런데 법원을 포함한 기성 조직은 안정을 위해서 가능한 즉흥을 피하고 관행을 선호하는 것이 본능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태도를 요즘 정치학 또는 사회학 용어로는 보수주의라고 해야 할지요. 반대로 기존 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개선을 추구하려는 태도를 진보주의라고 하는 거겠지요.
그러고보면, 신학 역시 보수와 진보를 시대에 따라 오가며 발전해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세시대에 관행에 파묻혀 버린 천주교의 문제들을 개혁하고자 나온 개신교 역시 500년이 되면서 종종 보수적 입장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가운데 예수의 애드립을 주목하는 이들은 진보적인 신학을 외치는 것 같습니다. 정답이 있을까요? 오네시모가 2천년전에 적어둔 독백은 여전히 유효한 듯 합니다. 교회는 어디로 가야할까요.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지요.
*그림 설명: "루비콘강을 건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군단" (프란체스코 그라나치의 1494년 그림)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