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작업에만 5십만 달러가 소요된 컬럼비안 박람회 건설 시작
1893년 5월 1일 컬럼비안 만국박람회의 개막식. 개막을 알리는 스위치를 누르는 클리블랜드 대통령
<김 신 교수>
오늘부터, 시카고 기 (Flag)의 3번째 빨강 별, 컬럼비안 만국박람회 (the World Columbian Exposition 컬럼비안 박람회)를 살펴본다. 시카고 깃발에는1939년부터 현재까지 시카고 역사의 주요 꼭지점을 나타내는 빨강 육각형 별 4개가 있다. 그러나, 1917년 처음 공식 채택된 시카고 깃발에는 1939년까지 빨강 별이 단 2개 (1871년 시카고 대화재, 그리고1893년 컬럼비안 박람회)였다. 시카고에게 컬럼비안 박람회가 그만큼 커다란 자랑이었고 자부심 그 자체였다는 말일 터! 시카고의 내노라 하는 인사들이 총 망라된 (컬럼비안) 박람회 유치위원회나 운영위원회가 지금까지도 시카고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놀랍게 한 마음이 되어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치룬 것을 보면, 불과 20년만에 다운타운이 초토화된 대화재를 극복, 미국의 제2대도시로 우뚝 선 시카고의 저력을 전세계에 과시하고 싶었겠지.
우선, 19세기 말 서방 세계에서의 미국의 위상을 아주 간단히 살펴보면서 컬럼비안 박람회가 주는 의미가 시카고를 넘어선 것임을 짐작해본다. 언급한대로, 컬럼비안 박람회는 그 명칭이 보여주듯 크리스토퍼 컬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의 1492년의 아메리카 신대륙 도착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연방 정부가 공포한 박람회이다. 박람회의 장소 선정도 연방 국회에서 하였고, 박람회 신청 도시에서 1천만 달러 (2020년 현재의 가치로는 2억 8천6백만 달러) 매치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지만, 박람회 건설과 운영 자금 대부분이 연방 정부의 예산이었다. 컬럼비안 박람회 이전에 미국에서는 이미 뉴욕의 Crystal Palace Expo(1853-54년)과 필라델피아의 Centennial Expo (1876년)가 있었지만 그때의 연방정부의 후원과 개입은 컬럼비안 박람회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였다. 연방 정부는 왜 컬럼비안 박람회에 그리 열심이었을까?
서방 세계에서 미국은 19세기 말까지도 ‘무서운 아이 (enfant terrible)’이었을 뿐, 강대국(superpower)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이점에서 미국의 파워를 보여주어 미국의 위상을 확실히 자리매김할 박람회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 박람회가 컬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400주년 기념이라면 명분도 충분한 안성맞춤이었을 터! 그렇다면, 왜 굳이 시카고를 박람회 장소로 선정했을까?
시카고 역사 이야기 16편에서 언급한대로, 연방 의회는 뉴욕과 시카고 중에 어느 도시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지 꽤 오랫동안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실제로 당시의 분위기는 “뉴욕과 시카고? 비교할 것을 비교해, 당연히 뉴욕!” 이었다. 이런 여론이 우세했던 배경에는, 시카고가 제2 대도시가 된 것도 1890년 센서스가 80만명 인구의 부룩크린 (Brooklyn, NY)을 뉴욕시에서 분리하였기에 가능했고, 불사조처럼 대화재에서 화려하게 재건했다지만 시카고는 ‘억세게 운 좋은 졸부’일 뿐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 당시 언론에 가장 많이 실렸던 만평에 시카고는 ‘화사한 옷과 진주 목걸이를 걸친 돼지 얼굴의 여인’ 이었다. 한 마디로, 시카고는 ‘눈을 씻고 보고 또 봐도 문화라고는 전혀 없는 막무가내 졸부’ 였던 것. 물론, 다른 도시들의 시샘도 한 몫 했을 터이다--이것은 필자의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카고가 마지막 승자가 된 것은, 문화적으로 신생 국가 (?)였던 미국을 서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인식과 함께 앞으로는 국가의 경제력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 같다. 미국의 활활 타오르는 젊은 경제 에너지를 과시하기에 그 당시의 시카고만 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독일의 철권 재상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가 방문해 역동적인 경제 에너지를 느끼고 싶어했던 유일한 도시가 시카고였으니까.
그런데, 그 당시 시카고는 최신 기술과 기업 자유로 무장한 경제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이지만, 동시에, 어떻게 인종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다른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조화롭게 커뮤니티를 유지해 갈 수 있는가라는 도전을 가진 도시였다. 달리 말하면, 19세기 말 시카고 리더들의 당면 과제는 어떻게 경제적 에너지를 계속 유지하여 미국 제2의 도시로 남아 있느냐 만이 아니고, 어떻게 모든 사람을 위한 경제도시 시카고를 만들 것인가 였다. 이러한 도전은 굳이 시카고에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당시의 미국 역사를 보면 눈코 뜰새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미국의 운명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지만 동시에 커뮤니티로서는 공중 폭발 분해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하였었다. 그 당시의 유명한 사상가 스트롱 (Josiah Strong)은 그의 유명한 저서 “Our Country: Its Possible Future and the Present Crisis”에서 이러한 현상을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social dynamite”라고 불렀다. 이러한 배경들을 기억하면 컬럼비안 박람회 운영위원회가 채택한 방식이 납득이 된다. 우선 건설 과정을 살펴보자.
시카고가 박람회 장소로 선정되자, 박람회 유치 위원회는 운영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곧장 그 당시 미국에서 조경 건축가로 가장 널리 알려진 옴스테드 (Frederick Law Olmstead) 와 Second City 시카고 건설에 공적이 큰 건축가 번함 (Daniel Burnham)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박람회 장소로 선정된 곳은 다운타운에서 7마일 남쪽 미시간 호수 변의 개발이 되지 않은 잭슨 팍 (Jackson Park)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시카고 대학의 미드웨이 플레이선스 (Midway Plaisance)와 워싱톤 팍 (Washington Park)에 이르는 600에이커의 땅이다. 이 땅을 조경하여, 인공 연못도 만들고, 물이 졸졸 흐르는 시내와 다리 (bridge)와 숲을 만들었고, 사이 사이에 건물과 조각품들을 배치하였다. 건물의 외형은 고대의 네오클래식 (Neo-classical) 스타일로, 내부는 현대적 모던 (modernism) 스타일로 정하고, 전세계의 유명 조각가와 건축가들에게 조각과 건축을 위탁했다.
이전의 여느 박람회보다도 3배는 큰 규모의 박람회 정지 작업에는12,000명 가까운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2년동안 임시 숙소에서 살면서 겨울 내내 전기 불을 밝힌 야간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큰 규모의 박람회를 2년간에 지을 수 있었는지 경이롭다. 앞서 설명한 대로, 시카고 선정이 많이 지연되었기에, 컬럼버스 신대륙 도착 400주년인 1892년에는 기념식과 퍼레이드만 하였고 1893년5월1일 정오에 역사적인 컬럼비안 만국박람회가 개막되었다. 200,000명의 인파가 모인 개막식에서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대통령이 개회 선언과 점등으로 시작된 이 박람회는 10월 31일에 폐막될 때까지 2천7백5십만 명이 다녀갔다.
컬럼비안 박람회의 별명은, 거의 모든 건물의 흰색 (white) 외벽이 밤새도록 그 당시로는 최신인 전기조명으로 휘황찬란하였기에, ”The White City” 이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