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역사이야기 <19>: 1893년 컬럼비안 박람회 뒷풀이 (1)

by skyvoice posted Jan 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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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_폐허가된.jpg

 

1.  "화재로 폐허가 컬럼비안 박람회"

 

 

 

2.19-2_만약예수님이시카고에.jpg

만약 그리스도가 시카고에 왔다면" 표지 그림

3. 19-3_시카고홍등가지도.jpg

시카고 홍등가 지도"

 

                                                                                                            

< 교수>

 

오랫동안 시카고의  No. 1 자랑거리였던The White City 1893년 컬럼비안 박람회는 189351일부터 1031일 까지 6개월 동안  미국 전역,  아니 온 서방 세계의 275십만 명이 시카고를 찾게 하였다. 컬럼비안 박람회가 이리도 큰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컬럼버스 신대륙 도착 400주년 기념으로 연방정부가 작심하고 올인하였던 것이 첫 번째 표면적 이유일 터이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1893년이라는 시점이 큰 작용을 하였다 싶다. 무슨 소리? 설명해 보자.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전후 복구시대 (the Reconstruction period)1870년대 말에 끝나고, ‘Gilded Age (황금빛 계급 형성시대)’가 열리면서 미 전역의 경제가 농업 경제에서 산업 경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산업 경제는 도시화가 동반되면서 교환 (exchange)이 절대 필요하기에 시장 (market)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고, 규제가 되지 않으면 경제의 굴곡 (up-and-down)이 심하게 된다. 굴곡이 심한 경제 시스템에서 살아 남으려면 (승자(winner) ‘=자본(capital)’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누구나, 어떤 방법으로나 자본 (capital=)을 끌어 모으려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겪는 빈곤 (poverty), 정경 유착, 착취하는 독점 기업 형성, 퇴폐 범죄의 만연 등 부산물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해로운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하나의 커뮤니티가 어느 정도 건전하게 지속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미국에는 1880년부터 새로운 유럽 이민의 대대적인 유입이 시작된다. 이때의 새로운 유럽이민은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밀려온 자본 없는 노동자 이민이 태반이어서 미국 사회에 반이민 사조가 팽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마디로, 1880~1890년 대는 미국이라는 공동체 붕괴의 위험 요소가 복잡 미묘하게 커진 불안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서, 컬럼비안 박람회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자. 박람회가 아주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박람회가 처음으로 미국 장래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였다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단지 박람회가 끼친 영향에 관하여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두 종류가 있다. 긍정적 평가는, 개인의 이윤 추구를 어느 정도 규제하면 도시화가 급속히 확장되는 미국의 미래가 밝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라고 축약된다. -– 박람회는 시카고의 최고의 건축가와 엔지니어, 공공 복지에 관심있는 사업가들이 한 마음으로 이룬 쾌거로서,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면 (문화와 공공 질서에 대한 인식이 없는) 저소득층 근로자들도 같이 즐길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박람회의 건물들의 외형이 전통적이면서 내부에서는 최신의 발명들을 잘 전시해서 인류의 발전상을 보여주었다—“컬럼비안 박람회는 전통과 변화’, ‘질서와 혁신이 완전 조화를 이루었다” (John Coleman Adams)고 했다.

 

부정적 평가는 여러 갈래인데: 첫재, 소위 해결책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하여서 그저 환상에 그친 박람회였다. 이 박람회는 범람하는 도시 악(evil)’을 사회 구조 상의 문제가 아닌, 개인 도덕의 문제로 강조하고 부각시켰기 때문에 근원적 해결책을 보여준 것이 아니어서, 좀 심하게 말하면, 박람회는 그저 눈 가리고 아웅했을 뿐이다; 둘째, 그 당시 미국 흑인들의 리더였던 Frederick Douglass가 제시한 것인데, 도시 건설에서 마이노리티, 특히 흑인들의 공헌을 아주 등한시하였다; 셋째,  박람회 안은 안전하고 깨끗하였지만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생명의 위험이 너무 많이,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박람회가 시카고의 고모라같은 퇴폐(vice) 산업이 크게 부각되어, 시카고의 나쁜 이미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893년 초부터 미 전역에서 시작된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컬럼비안 박람회 자체는 재정적으로 완전히 흑자였다. 그러나, 박람회가 끝날 즈음에는 시카고에도 이 경제 불황의 영향이 눈에 띄게 커졌다.  , 박람회 때문에 시카고의 경제 불황이 지연되었다고 볼 정도로, 박람회 폐막 직후부터 박람회 장소는 노숙자 천국이 되어가며 노숙자들과 경찰과의 충돌이 심해졌고, 소규모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박람회 장소 중에, Midway Plaisance는 시카고 대학으로 편입되었고, 잭슨 팍 (Jackson Park)의 일부는 공원, 일부는 놀이 공원 (amusement park)이 되었고, 또 어떤 때는 시민들의 데모 장소로 사용 되었다. 원래부터 영구 건물 계획이 없었던 탓인지 시카고 시가 건물 처리를 어영부영 하는 가운데 연방 군대와 철도 파업 노동자들 간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고, 급기야 189475일 저녁에 White City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고, 이 화재로 박람회 건물은 거의 다 소멸되었다. 컬럼비안 박람회 건물로써 보존된 곳은 필드 박물관 (Field Museum)이 된 Fine Arts Building 1933-34,  발전의 세기 (Century of Progress)” 박람회 후에 과학 산업박물관(Museum of Science and Industry)의 토대가 된 LaRabida빌딩, 이 두 건물 뿐이다. 장기적인 영향으로는, 박람회의 주위 지역인 켄우드(Kenwood)와 하이드 팍 (Hyde Park) 지역이  주택 시장의 과잉 공급으로 박람회 이후에 겪은 심한 경제불황을 들 수 있다. 그때까지 시카고 발전에 큰 축을 이루며 최대 시카고 상류층 지역이었던 South Side Northshore West Side에 밀려나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이 컬럼비안 박람회 이후부터 였다.

 

박람회 마지막 날에 박람회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모인 75,000명의 군중 속에 영국의 유명 언론인이며 사회 개혁 운동가였던 스티드(William T. Stead) 가 있었다. 미국 언론을 연구 차 미국에 온 것이 우연히 박람회 폐막일에 시카고였는데, 박람회에 흠뻑 매료된 그는 박람회 건물들을 철거할 계획이라는 소식에 ‘Save the White City’ 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물론 그가 보존하려고 한 것은 박람회의 외관상 모습이 아니고 박람회의 정신이었던 조화로운 도시 생활이었다. 그는 시카고의 교회와 노동 조합 리더들과 백만장자들이 기독교인의 가난한 자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하면 조화로운 도시, 시카고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18942월에 출판된 그의 저서, “그리스도가 시카고에 왔다면! (If Christ Came to Chicago! A Plea for the Union of All Who Love in the Service of All Who Suffer)” 는 출판 당일에 70,000권이 팔릴 정도로 시카고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만약 그리스도가 시카고에 왔다면 백만장자를 롤모델로 사는 많은 시카고언들은 그리스도가 휘두르는 채찍에 혼비백산하였으리라고 주장한다. 스티드 (Stead)가 시카고의 악명 (?)높은 홍등가 (Levee)를 얼마나 적나라하게 파헤쳐 놓았던지, 시카고 트리뷴지는 이 책을 시카고의 ‘directory of sin (죄악의 주소록)’이라고 할 정도였다. 겉 표지에 성전을  청결하는 예수그림을 넣었고 장사치의 얼굴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시카고의 대사업가들의 얼굴을 집어 넣어, 시카고의 기름 종이들이 이 책의 출판을 저지하려 무척 애썼다는 뒷 이야기가 풍성하다.  그는, 이 책에서 시카고의 부자 사업가들만 혹독하게 비난한 것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혹평하였고, 반면에 지낼 곳이 없는 이민자들에게 술을 팔면서도 동시에 잠잘 곳도 제공하는 술집  주인들이 오히려 더 기독교 형제애를 실천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책은 그가 시도한 도덕적 개혁 (Moral Reform)에는 그리 큰 기여는 없었지만, 시카고의 퇴폐 유흥업소로부터 (뇌물)’을 받고 묵인하여 준 시카고 시의원들의 부패를 폭로하여 시카고 정치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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