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환 목사 / 시카고 기쁨의 교회>
오랜만에 사촌 여동생과 통화를 했습니다. 동갑인데 몇 달 빠르게 태어난 덕분에 ‘오빠’ 소리 듣고 사는 사이지요. 내 집 마당인 듯 뛰놀던 동네에 지금은 대형마트가 들어섰다는군요. 갑자기 눈 앞에 그려지는 그 시절 풍경들! 잠자리 잡으러 온 동네 다 뛰어다니고, 술래잡기 한다고 남의 집 담까지 넘고, 하루 종일 놀다가 배고파 남의 밭 감자 서리한 기억까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그 때는 다 내 집이었지요. 2층 양옥집에서 살다가 단 칸 방 셋방살이 할 때도 괜찮았던 이유였어요. 동네가 다 내 집이었으니까. 꽃밭도, 마당도, 푸른 들판도, 파란 하늘도. 그러고 보니 어른이 되며 집들을 하나 둘 잃어버렸네요. 렌트비 걱정하고 내 집 장만 꿈꾸다가 우리 곁에서 사라져간 집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파블로 네루다가 그랬다지요?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나를 키워 준 그 집들은 아직 내 안에 있을까요, 아니면 사라졌을까요?
은총에 눈을 뜬다는 건, 세상의 작고 아름다운 것들이 다 나를 키운 집이라는 걸 깨닫는 것 아닐까요?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내 아버지의 집임을 불현듯 깨닫는 것. 심지어 길바닥에서 자던 야곱도 그랬잖아요.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7).
#시를잊은성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