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훌-하우스 전경
어린이들과 담소하는 제인 아담스
훌-하우스 박물관
<김 신 교수>
익히 아는 대로, 미국 건국의 유일한 명제는 “왕정 국가, 절대 NO! 민주국가, YES!“이었다. 이 큰 명제 외에는 ‘어떤 민주국가?’에 대한 세부적(?) 합의는 없었다. ‘어떤 민주사회가 될까?’는 1인 1표 투표 시스템을 통해 선출된 대표들이 결정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정치는 항상 시끄럽기 마련이고 남북전쟁 같은 홍역도 겪는다 싶다. 그래도, 1880년대 말 부터 미국은 미국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왜 그리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겪었을까라는 질문은 남는다. 필자는, 근본 이유를 대대적인 (동,남유럽으로부터의) 이민 유입과 급속한 자본주의가 주도한 산업화로 인한 사회의 분열 (양극화)에서 찾았다. 동,남유럽에서 밀려온 이민자들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생소한 미국에서 자신들만의 거주지역에서 주류사회 (mainstream) 와는 격리되어 살았다. 그리하여, 미국 사회는 “미국태생 (native) vs. 이민자 (이방인)”으로 양분되었고 (미국태생과 이민자) 서로 간의 소통은 거의 없었다. 동시에, 규제 안된 자본주의가 주도한 급속한 마켓 산업화가 가져온 극심한 소득의 불균형은 ‘미국이 과연 하나의 민주 국가로 유지될 수 있을까?’라는 사회적 위기감을 일으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에서는 1880년대 말 부터 진취적 개혁시대 (the Progressive Era)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의 전형적인 현미경 도시였던 시카고는 대대적인 이민의 유입과 급속한 산업화를 훨씬 짧은 기간에 훨씬 더 적나라하게 겪었기에 19세기 말에 시작된 시카고의 개혁 운동을 살펴보면 그 당시의 미국의 사회 풍조가 훤히 보이는 듯하다.
시카고역사 #19와 #21에서는 이 시기의 시카고의 개혁운동에 불씨를 던진 두 저서, 1894년에 출간된 스티드 (William T. Stead)의 “그리스도가 시카고에 왔다면 (If Christ Came to Chicago! A Plea for the Union of All Who Love in the Service of All Who Suffer)” 과 1905년에 초간된 싱클레어 (Upton Sinclair)의 “정글(The Jungle)” 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이 시기 시카고의 개혁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던 제인 아담스 (Jane Addams)의 훌 하우스 (Hull House)를 살펴보겠다.
1889년 9월 18일, 제인 아담스 (Jane Addams)와 엘렌 스타(Ellen Gates Starr)는 자신들의 임대 주택에서 부족한 영어로 인해 어려움과 차별 대우를 겪는 이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영어 고전 감상 클라스를 오픈한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그 유명한 “훌-하우스”이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한 이민자들에게 어 고전문학을 읽게 한다니 고개가 갸우뚱해지는데, 제인 아담스는 1910년에 초판된 “훌 하우스의 20년 (Jane Addams: Twenty Years at Hull-House)”에서 1884년에 시작된 런던의 토인비 홀 (Toynbee Hall)을 자신이 1887년에 방문하였을 때의 감격을 서술하고 있다. 토인비 홀 (*필자 주: Arnold Toynbee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것. 토인비는 옥스포드 교육을 받고 런던의 저소득층 지역에서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다가 32세에 사망했다.) 은 19세기 중후반에 시작된 진취개혁시대를 대표하는 “정착 운동 (Settlement House Movement)”의 시조이다. 오해받을 위험이 있지만 요점만 살피면, Settlement House 운동은 산업화의 실제 역군이면서도 산업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슬럼가에 모여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들이 받은 상류층 고등 교육을 나누어 빈곤층을 문화적으로 끌어올려 계급 간의 격차를 없애는 것을 초기 사명으로 삼았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아담스가 자신의 집에서 영어 고전 감상 프로그램을 열면서 훌 하우스를 시작한 것에 수긍이 간다.
훌 하우스는 그 당시의 새로운 이민인 이탈리안 (시실리안), 폴란드, 남부 독일, 그리스, 폴리시-러시안 유태인 빈곤층들이 기존의 아이리시, 보헤미안 사이에서 불록으로 어깨를 맞대고 살고 있었던 시카고의 Near West Side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주소는 800 S. 할스테드 (Halsted). Near West Side에서도 이탈리안 (시실리안)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아담스와 스타가 훌-하우스를 오픈하면서 인근 주민들에게 보낸 초대장은 “Mio Carissimo Amico.”로 시작하여 “Le Signorine, Jane Addams and Ellen Starr” 라고 끝난다. 왜 훌 하우스? 이 프로그램이 시작된 집 주인의 이름이 훌 (Charles Jerald Hull--억세게 재수 좋아 이름을 남긴 사나이 )이었기에. 아담스는 1935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집 윗층에서 살았다.
‘훌-하우스’의 탄생을 알렸던 영어 고전 문학 감상 클라스는 초기부터 이민자들의 호응이 아주 뜨거워서 확장을 거듭하게 되었고, 아담스는 곧 이어 이민자 여성들의 취업을 돕는 여러 프로그램들- 유치원, 탁아소, 바느질 클라스-을 시작하여 이민자들을 돕게 된다. 시카고 최초의 어린이 놀이터가 마련된 곳도 훌-하우스이다. 아담스는 이민 여성, 특히 기혼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관심이 많아, 청소년들을 돕는 프로그램을 첨가하고 젊은이들과 담소를 즐겼다고 한다. 1911년의 기록에 의하면, 훌-하우스는 오리지날 훌 하우스 주위의 13개 빌딩으로 확장되어 도시의 한 불록 사방을 다 차지하게 되었고, 1912년에는 썸머 캠프까지 마련하게 된다. 미국 태생 상류층이 소외된 이민자들에게 베푸는 자선 사업 같았던 초기의 프로그램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인 법 제도 마련에도 적극적으로 개혁 운동을 펼쳐 나간다. 예를 들어, 시카고 주택가에 설치된 어린이 놀이터, 정기적인 쓰레기 수거, 여성, 미성년자들의 8시간 노동법 등이 훌- 하우스 주도 하에 이루어 졌다. 또한, 아담스는 동료 래트롭 (Julia Lathrop) 과 플라워 (Lucy Flower)와 함께 시카고의 청소년 법원 (juvenile court)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훌-하우스가 너무 여성 중심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아담스는 시카고 상류층 (백인)여성들의 절대적인 후원 하에, 이민 여성, 특히 결혼한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도왔으며, 그들이 겪는 여러 차별에 대한 법적 대안을 제시하고 관철시켰다. 훌-하우스는 이렇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미국 개혁 운동의 표준 (standard bearer)이 되었고, 1920년에는 시카고와 미 전역에 훌-하우스와 맥락을 같이하는 Settlement House 500여 곳이 문을 열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로 활약했던 제인 아담스는 훌-하우스 운동으로 1931년에 미국 최초의 여성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제인 아담스는 1860년 9월 6일, 부모 (John Huey & Sarah Addams)의 9자녀 중 8번째로 태어나, 17세 되던 1881년 록포드 여자 신학교 (Rockford Female Seminary, 후에 Rockford College for Women)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원하던 의학 공부가 건강 악화로 좌절되어 여행에 나섰다가 런던에서 위에서 언급한 토인비 홀을 만나면서, 일생의 꿈을 이룬 케이스이다. 1935년에 훌-하우스에서 사망한 아담스의 장례식은 경제 대공황 중인데도 그를 대모로 모셨던 아주 많은 이민자들과 세계 각곳에서 몰려온 조문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훌-하우스 빌딩 대부분은 1960년대 중반에 아버지 데일리 (Richard J. Daley)가 주도한 일리노이 주립대학 시카고 캠퍼스 (University of Illinois-Chicago, UIC)로 편입되었고, 최초의 훌-하우스 빌딩은 박물관으로 US 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등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훌-하우스 협회 (Hull-House Association)는 2012년 1월까지 시카고의 여러 곳에 훌-하우스 지부를 열고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