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환 목사 / 시카고 기쁨의 교회>
아버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따르던 오촌당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아버지가 평소 쓰시던 모자를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사립 밖으로 걸어나가시는 것이었다.
- 이시영, <아버지의 모자>
상실의 아픔을 표현하는 여러 반응들이 있겠지요. 곡을 하며 울 수도 있고, 애써 괜찮은 듯 눈물을 삼킬 수도 있고요. 이 시의 오촌당숙은 아버지 방에 들어가 말 없이 앉아 있습니다. 고인이 머물던 자리에 앉아 그 부재를 느끼며, 혹은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추모식을 갖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더니 아버지 모자를 들고 나오며 한 마디 던집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이 당숙에게 아버지의 모자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를 계속 기억하기 위한 추억의 물건이자 아버지 삶의 일부이고, 어쩌면 아버지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모자를 쓰고 단호히 걸어갈 때 아버지의 삶의 길은 당숙의 걸음을 통해 이어집니다. 죽음으로 끝났던 아버지의 시간이 ‘사립 밖으로’ 다시 열립니다.
H 집사님께서 너무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새벽예배 자리를 어김없이 지키던 분이셨습니다. 팬데믹 때문에 예배당에 오지 못하게 된 이후로도, 댁에서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셨습니다. 집에서도 늘 양복을 차려 입고 예배하셨습니다. 친교 시간이면 미처 못 나온 교우들 위해 떡을 챙겨주시고, 집에서 기른 깻잎과 상추를 젊은이들에게 나눠 주시곤 했습니다. 이제 그런 집사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허전하고 시린 마음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늘부터 H 집사님의 모자를 쓰실 분 계신가요? 그 새벽기도의 자리를 대신하실 분, 교우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일 이어가실 분. 그런 가족들과 교우들이 있다면, H 집사님의 삶은 우리 안에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모자를 받아 쓰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부터 이 십자가는 내가 지겠다, 말하고 그렇게 걷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H 집사님의 영혼을 주께서 받으시고 영원한 안식에 거하게 하시길 빕니다.
--2021년 4월 11일
#시를잊은성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