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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의 시카고 Street C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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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란의 극치였던 1980년 시카고 제1선거구 무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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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Levee에서 열린 Ernest Beel의 전도집회>

 

 

<김 신 교수>

 

오늘은 Gilded Age (황금빛 계급 형성 시기) 떄에 시카고의 위용을 만천하에 알린 1893년 컬럼비안 박람회 직후부터 20세기 초까지 지속된 시카고에서의 좋은 정부 운동(Good Government Movement)”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그 당시의 정치 개혁 운동, 공공개혁 운동과 도덕적 개혁 운동을 살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시카고에서의 정치 개혁 운동은 매관매직을 통해 개인 재산을 축적할 뿐 아니라 엄연한 뇌물수수 행각에도 민주 선거에서 무난히 선출되는 관행에 도전한 개혁 운동이다.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는 굳이 어느 한 곳에서, 한 시대에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에 줄곧 있어온, 그리고 지금도 있는 일이지 만, 시카고의 매관매직과 뇌물 수수 상황을 만천하에 공개한 재판이었던 1887년의 Great Boodle Trial (대규모 뇌물수수 재판)로 시카고는 미국에서 뇌물수수의 수도 (the ‘Boodle Capital)”로 자리 매김하였다.    

 

우선, “boodle”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큰 규모의 뇌물을 칭한다. “Boodle”의 어원인 네덜란드어, ‘boedel’큰 자산 (wealth)’을 뜻하는 것으로, 부정적인 의미는 없이 지금도 그저 큰 부호를 지칭하는 나라도 있는데, 미국에서는1858년 경부터 주로 검은 (더러운) ’, 특히 정치적 뒷 거래, 뇌물 수수를 지칭하기 시작했다.  2019년에 보스턴 글로브 (Boston Globe)가 트럼프의 family farmers특별구제 정책을 비판하면서 구제금이 농업 종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배분된 것을 ‘boodle’이라 부른 것을 보면 미국에서 boodle은 현재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또는 개인적이든, 정책적이든 정당치 못한 뒷 돈을 의미하고 있다.

 

여하튼, 시카고에서의 boodle은 초기 시카고 정치 머신이 공개적으로 거두어 들인 부정 헌납금에서 시작되었는데, 위에 언급한 “1887년 재판을 겪고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공개적이고 제도화되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고 의하하시겠지만, 시카고의 생성과 성장 역사를 보면 그리 놀랍지 않다. 특히, 시카고는 1871년의 시카고 대화재 복구를 시작하면서 화려하고 웅장한 시카고의 건설에 올인했고, 다운타운에서의 빈곤층 주택 건설을 극심하게 규제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도시는 뒤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랬기에, 이들은 다운타운의 외곽 지대에 모여 살면서 다운타운으로 일하러 다녀야만 했다. 이런 빈곤층 거주 지역을 흡수하며 시카고의 본격적인 지리적 확장이 시작된 것도 사실이다.

 

그랬기에, 시카고는 일찍부터 전차 사업에 눈독을 들였고 전차사업 (streetcar)과 관련되어 ‘boodle’을 받은 시의원이 엄청 많아지게 된다. 당연지사!  1890년대 초부터 시카고에서는 시의원들에게 ‘boodle’ 이라는 닉네임의 () 뇌물을 상납해야만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성공 비결이 공공연한 정설 (?)로 자리잡는다. 철로를 설치해야 하는 전차 (street car)는 비교적 큰 설치 비용이라는 단점은 있으나 일단 설치 후의 운영경비는 미미하다. 그리고, 일단 전차 선로가 들어서면 그 주위의 땅값이 급등하기 마련이어서 전차 선로 설치와 관련된 뇌물 수수가 많이 행하여 졌다. 이 시기에 시카고 케이블 street car사업을 독점하였던 사람이 에르크 (Charles Tyson Yerkes)이다. 그러다가 전기 street car (전차)가 케이블카를 대신하면서 전차 사업가였던 맥도날드 (Mike McDonald) Yerkes의 뇌물 경쟁이 시작되었다. 어이없는 (?) 사실은, 맥도날드는 위에 언급한 1887년 뇌물수수 재판에서 매관매직의 시커먼 큰 손으로 실형을 잠시 살았던 시카고 최초 마피아 두목이고 초기 시카고 민주당 보스였었다는 점.

 

1896년에 조직된 시카고 선거권자 협회 (Municipal Voters’ League)에 의하면1896년에 시카고에는 선거구가 34개 이고 시의원이 68명이었는데, 시의원 68명 중 57명이 상습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boodle을 상납받은 boodler (뇌물 수뢰 공직자)였다.  

 

시카고 선거권자 협회는, 시카고역사 #19에서 상세히 설명한 스티드 (William T. Stead)1894년 저서, “예수가 시카고에 왔다면 (If Christ Came to Chicago! A Plea for the Union of All Who Love in the Service of All Who Suffer)”에서 실명이 거론된 다운타운 (Levee)의 퇴폐 유흥 업소로부터 을 두둑하게 받은 시의원들의 낙선 운동을 목표로 조직되었다.  조직되자 곧장1896년 시의회 선거에서 상습 boodler시의원 낙선 운동을 아주 공개적으로,조직적으로 벌려 1896년에 새로 선출된 36명 중에 26명은 선거권자 협회에서 정직한 정치인으로 인정을 받은 후보였다고 한다. 아뿔싸!  악명 높은 제1선거구의 boodler 시의원 콜그린(John “Bathhouse” Coughlin) 과 케나(Michael “Hinky Dink” Kenna)는 계속해서 시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그들이 주관한1선거구 무도회 (First Ward Ball)의 퇴폐와 문란성도 해마다 더 심해져 갔다. (*사족 하나: 1896년부터 매년 모인 제1선거구 무도회는 해가 갈수록 그 문란성이 더 커졌는데, 특히1908년의 무도회는 유서 깊은 장소에서 20,000명 가까이 모여 새벽까지 술과 도박 등 온갖 추태를 벌여서 지탄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이 무도회는 1910년에 드디어 정치적 금지 철퇴를 맞아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던 선거권자 협회는1915-1923년과 1927-31년에 시카고 시장을 역임한 톰슨 (William Hale Thompson)에 의해 속 빈 강정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시카고의 정치 개혁이 지속적이지 못하였던 데에는1897-1905년과 1911-1915년에 시카고 시장이었던 해리슨 2(Carter Harrison II)의 정치 개혁에 대한 미지근한 (?), 아니면 양면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1893년 컬럼비안 폐막식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의 집에서 저격 당하여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4년 후에 시장이 된 해리슨은 시카고의 정치 파워는 시의회에 있다고 판단하여서, 정치 개혁은 접어두고 공공시설 (civic) 개혁에만 몰두하였다. – 공공서비스 향상, 즉 깨끗한 생수, 좀 더 나은 오물 처리 시설, 좀 더 효과적인 소방 시설, 등등. 해리슨이 공공시설 개혁을 시의회에서 관철하기 위해 자신의 청교도 이미지를 타협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한 해리슨도 1911년에 시장에 재선되면서 다운타운의 유명한 퇴폐지역 (Levee) 척결을 시도, 시카고의 도덕적 이미지 향상에 힘쓴다. 1912년에 그 유명한 Everleigh Club을 폐쇄시키고 경찰국장을 교체하고, 경찰국을 재조직하였다.  이로 인해 해리슨은1915년 시장 선거에서 패하였다는 평이 있을 정도이다.

 

그 당시 시카고에 도덕적 개혁운동이 없었나? 미약했나? 아니다. 오히려 많은 개신교 전도자들이 도덕적 개혁운동에 나섰으나 그리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 시카고가 견고한 죄악의 도시여서? 아니다.  개신교 전도자들이 도덕성 함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들은 대다수가 동, 남유럽 이민자와 그 자녀로 사회의 빈곤층 노동자이고 카톨릭 신자였다는 점과 그 당시 시카고 상류층 (부유층)은 대다수가 미국 태생 개신교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당시 개신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 개혁 운동이 많은 시카고언들에게 외면당하였다는 기록이 이해가 간다.

 

혹시라도, 1887년의 Great Boodle Trial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Todd Haugh의 그리 길지 않은 Chicago’s “Great Boodle Trial를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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