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 ◈
피카소(1881 - 1973)가 생전에 남긴 작품 수는
5만 점 정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유화가 1885점, 복제가 가능한 판화,
조각, 도자기의 작품 수가 많습니다.
그 중 도자기 그림(도자 그림)은 약 2280점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한 도자기에 에디션이 50점 부터 500 점 짜리 까지 있으니
대략 400 점 정도의 원판 도자기 그림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냈고,
도자기 위에 그려진 수준 높은 그림에 감탄했습니다! .
따지고 보면 고대부터 동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만들고,
그런데 유럽과 동양 사이에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유럽 귀족사회에서는 동양 도자기 수집 열풍이 불었습니다.
아울러 도자기 제작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
공장들이 활발하게 가동되기 시작했고,
피카소가 도자기에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47년 여름이고,
위의 작품이 첫번째 작품입니다.
그가 도자기 그림 작업을 한 곳은
프랑스의 도자기 도시인 발로리(vallauris)인데,
당시 그는 '평화 운동(peace movement)'에 참가하면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발로리 성당에 <전쟁과 평화>라는 대형 벽화를 그렸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조국 스페인에서 발생한 내전 때문에
조국에 등을 질 정도로 평화에 대한 신념이 투철했기에,
한국전쟁에서 벌어지는 살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의 평화를 특별히 염원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과 평화> 벽화 중
평화 부분에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을 그렸고,
그 당시 <한국에서의 학살>을 유화로 그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도자기 그림 작업에
쟈클린 로끄는 피카소 보다 40년 연하인데,
발로리에 있는 도자기 공장 관리인의 조카로서
공장의 뒷일을 돌보는 젊은 이혼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피카소에게는
자신과 같은 여인의 헌신적 뒷바라지가 필요하다며 적극적으로 매달렸고,
그리고는 그가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도록 내조를 했고,
피카소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위의 작품을 비롯해 여러 점을 그렸습니다.
피카소가 어린 아이 때부터 소질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그가 14살 때,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스페인의 거의 모든 미술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스페인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일 뿐 아니라,
19살 때인 1900년에 바르셀로나에서 화가로서의 첫 전시회를 열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번듯한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것이 아니라
바르셀로나 뒷골목에 있는 선술집에서 150점의 스케치를 전시한 것이지만,
그러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그에게 바르셀로나는 너무 좁았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피카소는 프랑스어도 못해 고생을 많이 하면서 방황을 했지만,
'화려한 여성 편력'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등장하고,
'여자가 바뀔 때 마다 그림의 화풍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자와 그림에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높이 22cm 에디션 261/300! 1959
그의 첫번째 연인은
<아비뇽의 처녀들>은 현대미술에서 입체파의 출현을 알리는 작품으로,
그는 첫번째 연인인 페르낭드를 위해 1908년에 <부채를 든 여인>을 그렸습니다.
높이 31.5cm 에디션 500 1955
피카소의 두번째 연인은 에바 구엘이었습니다.
'여자가 곁에 없으면 못 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피카소의 세번째 연인은 발레를 하는 올가 코홀로바라는 여인이었습니다.
피카소는 1917년 다른 연인들에게도 그랬듯이
그리고는 그녀를 떠났습니다.
피카소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을 때 만났고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입곱이었습니다.
1930년에 그린 <꿈>과 1939년의 <팔꿈치를 기댄 마리 테레즈>가 대표적 작품입니다.
피카소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한명 낳았지만,
<게르니카>는 히틀러가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을 돕기 위해
피카소는 이 작품을 당시 연인이던 도라의 도움을 받으며 한달만에 완성했습니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정신착란에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피카소의 연인'들 중 유일하게 피카소를 버린 여인입니다.
그녀는 스물 한살 때인 1941년 피카소를 만났는데,
법학대학을 나왔지만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 당했을 때라
법학을 포기하고 미술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1944년 집을 나와 63세의 피카소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피카소가 그녀의 친구와 바람을 피자,
그녀는 피카소에게 결별을 선언합니다.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리고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피카소 호적에 입적시켜,
그가 사망한 후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를 떠났는데도 피카소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훗날까지 그녀의 모습을 그렸으니,
이것이 피카소의 인간적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피카소가 80세 때인 1961년에 젊디 젊은 쟈클린과 결혼신고를 하자
그러나 그녀는 이런 세상의 눈길을 아랑곳 하지 않고,
도자기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잘 살려서
피카소가 도자기 그림에 심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습니다.
이렇게 피카소의 말년을 함께한 쟈클린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에게 남겨져있던 상당수의 도자기 그림들을
피카소가 첫 전시회를 열었던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에 기증해서 헌신적인 남편 사랑을 다시 한번 세상에 보여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