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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의 레익프론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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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시카고 도면

 

28.3_Montgomery Ward Bust in South Grant Park.jpg

그랜트팍을 지켜보는 몽고메리 워드

 

                                                                                        

 

<김 신 교수>

 

현재 시카고에서 사람들이 찾는 시카고 명소들 중의 명소, 시카고명소No. 1’은 어디일까?  관심사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전 미국의 도시계획 전문가들 (city planners)“breathtaking! (굉장히 멋있다)”하며 부러워하는 곳, 시카고 관광에서 빠트릴 수 없는 곳은 단연코 확 트이고 잘 정돈된 아름다운 퍼블릭 공간 레익프론트이다. 밀레니움팍 (Millennium Park)이 세워진 최근까지 그랜트팍 (Grant Park)이라 불렸던 레익프론트. 그곳에서는 해마다 온갖 축제들이 열리고 (2020, 2021년에는Covid-19으로 축제의 규모와 횟수가 줄었지만), 잘 꾸며진 정원이 있고, 시즌에 맞게 버킹함분수 (Buckingham Fountain)가 색칠을 하는 등 일반 시민들의 눈, 귀와 입이 즐거워지고, 무엇보다도 숨통이 확 트이게 만드는 미시간 호수를 보며 편안히 쉴 수 있다. 우리는 오랜 기간 이런 시카고의 레익프론트에 익숙한 탓에 무덤덤하지만, 상업도시로 맞춤 형성되어 역사에 유래 없을 정도로 줄곧 비지니스만이 최--최우선인 시카고에서 금싸라기 다운타운 미시간 호수변에 랜돌프에서 12/미시간애베뉴에서 레익쇼어에 이르는 319에이커의 서민 공간이 어떻게 마련되어 백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오늘은, 시카고 레익프론트의 아슬아슬했던 그래서 신의 손길이라 볼 수밖에 없는 역사를 살피겠는데, 레익프론트 형성에 관련된 역사, 사회, 정치, 경제적 여건을 볼 수 있게 시카고 역사 복습으로 시작한다.   

 

일리노이 주정부는 1829-1830년에 톰슨 도면에 의거해 1830년부터 동부 (주로 뉴욕) 지역 투자자들에게 시카고 지역에서 토지 매각을 시작했고, 1833년에 인구 200명의 시카고 읍 (Town)을 쿡 카운티 county seat (군청 소재지)로 발표한다. 행정 조직이나 건물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저 지도에 이름을 올린 것뿐이었다. 제대로 된 교역의 교차로가 되려면 시 (city)가 되어야 하고, 시가 되려면 인구 6,000명이 있어야했다. 1825년에 이리 운하 (Erie Canal)의 개통으로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을 통한 뉴욕시와 뉴올르리안스 상권을 연결할 상업 도시, 시카고의 입지적 중요성은 잘 알려져 있어 부동산 매매는 불티나는데, 왜 이리 상주 인구 증가가 미미할까? 그 타개책으로 설립된 <일리노이-미시간 운하건설특별위원회 (I-M Canal Commission)-- 이후 운하위원회>1836년에 시카고 지역 토지 매각의 범위를 톰슨 도면의 메디슨에서 운하 시발점인 될 현재의 브리지포트 (당시에는 시카고 외곽의 카날포트Canalport) 와 같은 위도의 12가까지 확대한다.

 

그 당시 시카고 다운타운의 동쪽 끝은 현재의 미시간 애배뉴 (Michigan Avenue)이었고, 메디슨에서 12가까지 미시간 호수와 미시간 애배뉴 사이에 질펀한 습지가 있었다. (1673년 마르켓-졸리엣의 시카고 발견 기록에 의하면, 바다 같은 미시간 호수에서 세차게 불어 닥치는 거친 날씨를 막아줄 자연 방패가 전혀 없는 시카고에서 이 습지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운하위원회의 커미셔너 3사람이후버드 (Gurdon Hubbard), 톤턴(William Thornton) 과 아처 (William Archer)-- 이 습지를 팔지 않고 영구히 개발하지 않는 공공의 공간 (Public Ground: A Common to Remain Forever Open, Clear and Free of any Buildings, or other Obstruction Whatever)으로 지정하였다. 왜 그랬을까?  습지라서? 그래도 다운타운이어서 아주 높은 가격에 매각되었을 텐데. 실제로, 1852년에 일리노이 센트랄 철도회사 (Illinois Central Railroad)가 동부에서 오는 열차들을 시카고강까지 연결하려고 이 습지의 중간 중간에 교각 (trestle)을 세우고 철로를 설치하느라 시카고시에 높은 값을 지불했다.

 

여하튼, 1836년에 왜 이 습지를 영구히 퍼불릭 공간으로 남겨놓았는지는 커미셔너 자신들도 몰랐겠다 할 정도로, 오랜 기간 아무도 그런 조항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일리노이 센트랄 철도회사의 제안에 오매, 좋은 것! 폭풍우를 막아주고, 게다가 시 재정에 큰 보탬이 되니, 일석이조! “했다.  이렇게1836public land조항은 단기적 경제 효율성의 극대화에만 몰빵했던 비즈니스 위주의 사조에 밀려 시카고의 기억에서 잊혀 갔고, 레익 팍 (Lake Park)으로 명명된 이곳은 1871년 대화재의 엄청난 양의 잔해물 처리장이 되었고, 빈민촌 판자집과 가축 축사들이 세워졌다가 허물기를 반복했고, 노동자의 스트라익을 진압할 군대의 임시 막사가 설치되기도 하는 등, 시카고의 온갖 쓰레기들이 일리노이 센트랄 철로 교각을 다 채울 정도로 쌓여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 곳은 레익 팍 명칭과는 거리가 먼, 그리고 시카고 모토 정원도시 (Urbs in Horto- City in a Garden) “가 무색한 big mess, 그래도 아름다운 미관이 밥 먹여 주냐?’ 가 대세였다.  과연 시카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1890년이 된다.

 

1890년의 시카고 인구는 백만 명을 넘겨 (1,099,850) 미국의 제2 대도시가 되었고 연방정부가 전 세계에 미국을 자랑하고자 계획한 컬럼비안 박람회 개최를 신청한다.  박람회 장소로 예정된 잭슨팍은 다운타운에서 (미시간 애베뉴를 따라) 7마일 남쪽 미시간 호숫가이다. 그리고, 미시간 에배뉴에는 레익 팍을 제외하면 양 옆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빌딩들이 즐비했다.  커다란 쓰레기장이 된 레익팍은 어쩐다? 당시 시카고 시장 (DeWitt Cregier)과 시의회는 레익팍에 건물들- 아트인스티튜트, 필드 뮤지엄, 그리고 시청, 우체국, 경찰서, 파워 플랜트, 쓰레기 수거차 (garbage collecting wagon) 주차장, 마차를 끄는 말들의 축사를 총망라한 시빅 센터-을 세워 레익팍 미화 계획을 세운다. 물론, 1836년 퍼불릭 공간 (Forever free of any buildings) 조항은 까마득히 잊은 채로. 혹여나 어렴풋이 기억했더라도, (일리노이) 주정부가 토지소 유권을 (시카고) 시로 이전해 주었으니 문제 전혀 없음이라고 했을 터.

 

1890년의 초여름 어느 날, 본격적으로 시작된 레익팍 정지 작업을 자신의 사무실 창으로 내다보던 몽고메리 워드 (Aaron Montgomery Ward)는 그의 변호사 친구, George Merrick에게 정말 꼴불견이네.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조치를 취해 봐. (This is a damned shame! Go and do something about it.)” 지시한다. 이렇게 시카고의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레익팍을 우리가 아는 서민 공간인 그랜트팍으로 바꾸는 법정 싸움이 시작되었다. 몽고메리 워드의 최초 소송 제기는 18901016일이고 주대법원이 워드의 손을 4번째,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들어준 것은 1910 12 21일이다. 그러니까 몽고메리 워드는 거의 20년을 그랜트팍을 위한 법정 소송에 매달린 것이다. 소송 비용도 $50,000 (현재의 가치로는 $200,000이 넘는다)을 지불했다. 어디 그 뿐일까? 워드가 레익팍을 일반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시의회와 시카고 리더들은, ‘금싸라기 같은 땅인데, 시 재정에 도움이 안 되는 공원이라니, 기막혀!’ 하며 난리를 피우며 워드 죽이기여론 몰이를 했고, 비지니스의 절대 후원자였던 시카고 트리뷴 지는 워드를 고집불통 노인네, 무슨 꿍꿍이?’ 라고 비방하는 만화를 계속 연재했다.  여하튼, “The rest is history.”

 

몽고메리 워드는 누구인가? 시카고 대화재 직후인1872년에 미국 최초로 mail-order 비즈니스 A. Montgomery Ward회사를 창업, 미국의 물품구입 문화를 바꾸면서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시킨 오너CEO. 그는, 메디슨-미시간 (주소는6 N. Michigan Ave)8층짜리 최신 고층 사옥을 짓고 1890년 초에 옮겨왔는데, 줄곧 언젠가는 레익팍을 명실상부한 확 트인 시민 공간의 퍼불릭 팍으로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는데, 빌딩들로 레익팍을 채우겠다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소리!’라 했고, 레익팍에 들어설 빌딩 건설에 부정부패 (boodler)한 시의원 KennaCoughlin이 좌지우지하던 그 당시 시카고 시의회가 꿀꺽할 엄청난 뒷 거래도 예상하고 있었다. 흔히들, 법률적으로 몽고메리 워드의 소송이 일반 시민 (퍼불릭)(레익팍 같은) 퍼불릭 공간의 사용 권리를 갖는 Public trust doctrine에 의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워드의 소송은 법적 근거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빅 센터 건설은 주민들이 선출한 시의회의 결정이니까. 몽고메리 워드가 1836 Public Ground 조항 준수를 요청하며 사용한 법적 근거는 퍼불릭 공간 사용권은 우선적으로 퍼불릭 공간에 인접한 빌딩 오너들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한다Public dedication doctrine이다. 이 독트린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었으니, 1890년 말 법원이 워드의 승소를 결정하자 시카고 시의회가 발칵 뒤집혔다. 그러면서, 워드와 밀고 당기는 오랜 협상이 시작되었다. 1909년까지 지속된 협상에서 현재의 아트인스티튜트(미술관)가 살아 남았고, 현재의 버킹함 분수 자리에 계획되었던 필드뮤지엄은 1927년 그랜트팍 (1901년에 레익팍에서 그랜트팍이라고 개명함) 남쪽 끝으로 밀려났다.

 

몽고메리 워드의 노력에 가장 큰 심리적 힘을 실어준 것은 이미 살펴본 번함 플랜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레익프론트 형성이 순조롭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워드는 191369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1909년 말 일리노이 대법원이 워드의 손을 확실하게 들어준 직후, 처음이자 마지막 언론 인터뷰를 20년 내내 자신의 노력을 폄하했던 시카고 트리뷴과 가졌다. 거기에는, 20년의 외로운 법정 공방으로 그가 얼마나 심리적으로 힘들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Here is park frontage on the lake….which city officials would crowd with buildings, transforming the breathing spot for the poor into a showground for the educated rich. I do not think it is right… I fought for the poor people of Chicago, not for the millionaires.  Perhaps I may yet see the public appreciate my efforts. But I doubt it.”)

 

 사족 2가지: (1)버킹함 분수는 동명의 영국 왕실과는 완전 무관한 케이트 버킹함 (Kate Buckingham)이 아트인스티튜트의 이사였던 자신의 형제, 클래란스 (Clarence)를 기념하기 위해 기부한 5십만 불로 건설되었는데, 베르사유 궁전 (Versailles) 분수의 2배 크기로 만든 것이다.  

(2) 시카고의 레익프론트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Louis Wille“Forever Open, Clear, and Free: The Struggle for Chicago’s Lakefront” 를 추천한다. 혹시라도, 퍼불릭 공간의 사용권에 한 사회, 정치, 법적 분규에 관심이 있으면, Joseph Kearney and Thomas Merrille“Lakefront: Public Trust and Private Rights in Chicago”를 권장한다. 두 책 다 영어로 되어 있지만 읽기가 수월하고 그리 길지 않다.

 

시카고에게 굉장히 멋있기로 유명한 시카고 레익프론트를 선물해준 몽고메리 워드에게 시카고가 드리는 Big Thank you의 상징인 워드의 흉상이 지금도 그랜트 팍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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