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의 motion picture camera, Kinetograph
Kinetoscope-일인용 필름 프로젝터
셀릭 스튜디오 제작 영화, "Tramp and the Dog" (1896)
에세네이 영화사 제작 영화, "In His New Job" (1915)에서의 튜르핀(좌)과 채플린(우)
에세네이 영화사 제작, "The Tramp" (1915 )의 마지막 장면
<김 신 교수>
지난번 컬럼, 시카고 역사 이야기 <29> 끝자락에서 드린 질문, “미국의 영화 (motion picture) 산업은 누구의 주도 하에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의 답이 오늘의 주제인데, ‘누가 주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헐리우드 (Hollywood, CA)에서 시작했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오늘의 칼럼은 다소 의외일 수 있겠다.
미국의 영화산업 (film industry)은 토마스 에디슨 (Thomas Edison)의 1889년 발명품Kinetograph에서 비롯되었다. 1,093개의 개인, 그룹 특허를 소유한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은 당시 청력이 살짝 가버린 상태에서도 뉴저지 주 멘로팍 (Menlo Park- 현재의 Edison, NJ)에 세계 최초의 산업 연구실을 마련하고 전구 (백열등)에서부터 여러 상업화가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는 중, 1877년에 축음기 (phonograph)를 발명한다. 이 축음기는 미국 사회에서 상류층의 상징이 되어 19세기 말 미국의 홈 오락 (home entertainment) 산업의 톱스타 황금 거위알이 되었다.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에 비주얼 (visual)을 덧붙여 눈과 귀가 동시에 즐거우면 ‘초초 대박’이겠다고 생각한 에디슨은 그 기술 발명을 자신의 연구실의 젊은 연구원 딕슨 (William Kennedy Dickson)에게 전담시킨다. 1888년에 딕슨은 드디어 Kinetograph를 발명하고, 1889년에 에디슨의 발명품으로 발표했다 –이것의 미국 특허 신청은 1891년. Kinetograph는 움직임을 찍는 카메라 (motion picture camera)이다. 그리고, 에디슨은 1895년에 미국 최초의 영화 (motion picture) 스튜디오 바이오그랖 스튜디오--정식 이름은American Mutoscope and Biograph Co.--을 설립한다. 그 2년 후인 1897년에 딕슨은 Kinetoscope (a peep-hole motion picture viewer- 일인용 필름 프로젝터)을 발명하여 에디슨은 돈방석에 앉게 된다. --*여기서 사족 하나: 에디슨이 모든 영광을 독식했던 탓인지, 딕슨과의 법정 싸움이 1902년까지 지속되었다는 뒷담화가 있다.
이렇게, 미국의 영화산업은 에디슨이 주도하여 뉴욕, 뉴저지에서 1895년에 시작되었는데, 그 다음에는 어디가 중심이 되었을까? “그야 물론 캘리포니아의 헐리우드!” 하시는 분들에게는 “미국 영화산업의 메카’로서의 헐리우드의 입지는 1925년에 워너 브라더스 (Warner Brothers)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려드리고, 오늘은 미국 영화 산업에 관한 시카고의 일급 비밀 (the best-kept secret) 하나를 밝힌다. 다름 아닌, 1917년까지 미국에서 영화 산업을 이끌었던 시카고의 에세네이와 셀릭 스튜디오 이야기이다.
셀릭 스튜디오 (Selig Polyscope Company)는 서부에서 매직 쇼를 주관하던 셀릭 (William Selig)이 1896년에 시카고에서 설립한 영화 회사인데, 이 회사의 첫 번째 작품은 그 유명한 ”Tramp and the Dog (1896)”-아직도 유투브에서 볼 수 있다. 셀릭은 에디슨의 특허권때문에 제약이 많은 기술과는 다른 자기만의 기술로 로칼 실제 사건의 기록 영화 (actuality documentary), 과장된 몸짓의 코미디 (slapstick comedy), 여행기 (travelogue)와 산업체가 의뢰한 영화 (industrial film)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아주 많은 영화를 단기간에 만들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1909년부터는 로스앤젤레스의 에덴데일 (Edendale) 지역에 전용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 두 곳에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결국은 캘리포니아로 완전 이전한다. 미국에서 로케이션 촬영과 전용 스튜디오를 시작하였던 셀릭 스튜디오는 우여곡절 끝에 영화 회사 셀릭은 문을 닫는다 (1918년).
에세네이 영화 회사 (Essanay Film Manufacturing Co.)는 1907년 8월 10일에 시카고 다운타운의 노스 웰스 (N. Wells) 1300번지에서 문을 열었다. ‘에세네이’ 라는 조금은 기이한 회사 명칭은 이 회사의 공동 창업주인 죠지 스푸어 (George Spoor)와 길버트 앤더슨 (Gilbert Anderson), 두사람의 성의 첫 글자 S와 A를 풀어서 붙인 (Ess-an-ay) 것이라고 한다. 이 회사가 만든 첫 번째 영화는 “어이없는 스케이터 (An Awful Skater).” 에세네이 스튜디오의 청소부였고 배우 워너비 (wanna be)였던 벤 튜르핀 (Ben Turpin)을 주연으로 한 코미디인데, $100도 못되는 촬영비로 몇 천불을 버는 대박이 나면서 튜르핀은 스타덤에 올랐고, 스튜디오를 시카고의 Uptown지역인 1333-45웨스트 아가일 (West Argyle)의 넓은 건물로 이전한다.
에세네이 스튜디오는 서부 영화와 코미디에 주력했는데, 특히 서부 영화에서는 완전 독보적이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원래 배우 출신인 창업주 앤더슨이 직접 각본도 쓰고 주연도 하고 감독도 하면서 ‘Branco Billy’ 풍의 카우보이 영화를 한 주 (1 week)에 한 편 씩 376 주를 계속하여 찍어 냈다. 이로 인해 앤더슨은 ‘서부 영화’라는 장르의 개척자로 인정받았으며, 자신의 이름에 Branco Billy라는 애칭이 첨가되어 그는 G.M. ‘Branco Billy’ Anderson으로 알려진다. 물론 짧은 무성 영화였지만 7년 하고도 3개월 동안 꾸준히 일주일에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는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 가능하였던 이면에는 동업자 스푸어의 탁월한 사업 수완이 있었다고 한다. 376편의 영화에는 시카고의 라저스팍 (Rogers Park)에서 촬영한 것도 여럿 있고,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등등, 타지 원정 로케로 촬영한 것도 많다. 원정 로케는 앤더슨이 직접 촬영팀을 이끌었고, 가는 곳마다 좋은 볼거리를 선사하며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 당시 에세네이 스튜디오 소속 배우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당대의 내노라 하던 인기 배우들이 즐비하다. 그 중 유명한 사람 몇 명을 들자면, 창업주이며 서부 영화의 개척자 앤더슨과 첫번째 영화로 배우가 된 튜르핀 외에도 육체파 여배우 스완슨 (Gloria Swanson), 아이돌 배우 부시맨 (Francis X. Bushman), 그리고 찰리 채플린이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한 배우는, 아마도 무성 코믹 영화의 대가, 찰리 채플린 (Sir Charles Spencer Chaplin)이다. 채플린은 1915년에 뉴욕의 키스톤 (Keystone) 스튜디오에서 스카웃되어 에세네이로 이적했는데, 1916년에 에세네이를 떠날 때까지 에세네이에서 일년간14편의 코믹 영화를 만들었다. 이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풀이 죽어 카메라를 등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가 새로운 다짐을 하며 어깨를 쫙 펴는 마지막 장면으로 유명한 ‘방랑자(The Tramp)’ 이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Tramp”라는 유머와 동정심을 자아내는 캐릭터를 처음으로 선보이는데, 채플린의 천재적 독창성이 드디어 에세네이에서 진면목을 꽃피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외에도, 채플린은 ‘챔피언 (The Champion)’, ‘은행 (The Bank)’, ‘억지 강요 당함(Shanghaied)’, ‘그의 새 직업 (His New Job)’ 같은 창의력과 위트가 넘치는 영화를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앤더슨과 채플린으로 인해 1915-16년은 에세네이 스튜디오 최고의 해가 되었다.
채플린이1916년 시카고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싫다는 핑계를 대고 더 좋은 대우를 약속한 뮤추얼 (Mutual) 영화사로 떠난지 1년 후인 1917년에 시카고의 에세네이 스튜디오는 문을 닫게 되었고, 모든 영화 촬영은 1912년에 오픈한 나일스 밸리 (Niles Valley, CA)의 에세네이 스튜디오에서 하게 된다. 채플린의 코믹 영화와 앤더슨의 서부 영화 외에도 시카고의 에세네이에서 만든 유명 영화로는 미국 최초의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1916), ‘크리스마스 캐롤 (A Christmas Carol)’ (1908), 그리고 제시 제임스의 영화, ‘미조리주의 제임스 청년들 (The James Boys of Missouri)’ (1908) 등이 있다. 그리고, 에세네이 창업주인 스푸어와 앤더슨은 시카고의 에세네이가 문을 닫은 후에도 영화 산업에 매진하였고, 에세네이 스튜디오의 선구자적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과 1958년에 각각 오스카 특별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시카고에서는1990년대에 ‘에세네이 복원 운동’을 계기로 인해 1333-45웨스트 아가일 (West Argyle) 에세네이 스튜디오 건물이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아들 데일리 (Richard M. Daley) 시장이 미국 영화 산업에서의 시카고의 역사적 역할을 증명하는 기념비적 건물이라고 극찬한 에세네이 스튜디오는 1907년 부터 1917년까지 미국 영화 산업의 견인차였고, 시카고는 미국 최초의 헐리우드였다. 한 가지 첨부할 점은, 1927년에 에디슨이 소리를 필름에 접붙일 때까지 미국 영화들은 무성 (silent) 영화였으니까 에세네이 스튜디오는 미국 무성영화의 견인차였고, 칼라 영화가 시작된 것이 1940년대이니, 미국 최초의 헐리우드 시카고는 흑백 무성 영화의 메카였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