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디펜더"의 창간인 에봇
1916년 5월 20일자 디펜더
1919년 8월 2일자 디펜더
1919년 7월 30일자 호외판 디펜더
1919년 "시카고 디펜더" 전국 구독자 분포도
1925년 4월 4일자 디펜더
2019년 7월 10일자 마지막 프린트판 "시카고 디펜더"지
<김 신 교수>
1905년 5월 5일, 시카고에서는 “시카고 디펜더 (The Chicago Defender)”—흔히, “the Defender”라고 부른다--라는 6 컬럼에 4페이지짜리 broadsheet주간지 (weekly newspaper)가 창간호를 선 보였다. 1910년까지 풀타임 고용원 없이 혼자 기자, 편집인, 행인, 배달원을 도맡았던 로버트 S. 에봇 (Robert Sengstacke Abbott)이 자신이 세 들어 있는 주인집 부엌에서 단돈 25센트의 자본금으로 자신이 취재한 로칼 뉴스와 미국 타 지역의 신문에서 전재한 기사들로 꽉 채운 “시카고 디펜더”의 창간 첫 호는 총300부수가 발행되었다. 이렇게 시작이 미미했던 “시카고 디펜더”는 발행 직후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도 누구나 다 인정하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고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흑인 (African American) 신문이 되었다.
시카고에서 지역 신문 (newspaper-daily or weekly)의 발간은 일리노이 주정부가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건설 계획과 함께 발표한 시카고 개발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역사가 길다. 1837년에 시카고시가 공식 출범하기 훨씬 전에 이미 시카고에는 부동산 정보로 도배를 한 지역 신문이 발행되었고, 부동산 전문 변호사 사무실이 상주 인구에 걸맞지 않게 많았다. 토지 투기 붐으로 시작된 ‘부동산 로또’, 시카고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긴 한데, 인구가 십만 명이 조금 넘었던1860년에도 시카고에는 11개의 일간지와 22개의 주간지가 발간되고 있었다고 한다. 십 만명 인구에 11개의 일간지와 22개의 주간지? 와우! 정말 많았네! 그 많은 신문들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은 그때도 단연코 “시카고트리뷴” 이었다. 그런데, 트리뷴은 노골적으로 지배 계층인 ‘the Haves’의 이익만을 대변하면서 반-노동자, 반-카톨릭, 반-이민자 렌즈로 모든 보도와 기사를 내보냈다. 따라서, 시카고시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던 서민들은 흑, 백을 막론하고 자신들을 위한 언론 (신문)에 목말라 했다. 특히, 흑인들은 그 당시 시카고에서 소수 중의 소수였기에 --시카고에 제한하지 않고-- 전국적인 시각으로 흑인의 권익 향상을 도모하겠다고 창간된 “시카고 디펜더”를 두 손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1905년에 주간지로 시작한 “시카고 디펜더”는 1956년에는 일간지 (daily)로 발행하였고 2008년에 다시 주간지가 되었다가 2019년 7월 10일 부터는 디지털 (온라인) 신문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니까, “시카고 디펜더”는 무려 114년을 프린트 신문으로 발행되었고, 지금도 디지털 매체 (chicagodefender.com)로 흑인 사회를 대변하는 언론이다.
“시카고 디펜더”를 창간한 애봇 (Robert S. Abbott)은 1868년 11월 24일, 조지아 주 센시몬스 아일랜드 (St. Simons Island, GA)서 태어나 성장하였다가 1893년에 컬럼비안 박람회의 공연을 위해 시카고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던 한 중창단의 20대 청년 단원이었다. 1890년대에 시카고에는 “흑인들에게 추운 시카고 날씨는 힘든가봐!’ 할 정도로 흑인 인구가 적었다. 그러나, 법적 억압이 공식화된 Jim Crow남부에서 흑인이기에 겪는 기막힌 잔학 행위를 목격하며 성장한 에봇에게 추운 시카고 날씨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왜? 흑인과 백인이 같은 기차칸에 앉을 수 있고, “white only” 표시도 없으니, 숨통이 탁 틔어 살 맛이 났으니까. 동시에, 에봇은 시카고 언론에 흑인들이 겪는 린칭 (lynching) 등의 극악무도한 차별이 거의 보도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에봇은 남부 지역에서 흑인이 당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제도적 차별을 널리 알려 흑인의 권익 향상을 도모하자는 목표로 “시카고 디펜더”를 창간하게 된다.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되었던 “시카고 디펜더”는 몇 년 안되어 구독자의 70 %가 시카고가 아닌, 타 지역 주민일 정도로 미 전국에서 가장 큰 흑인 언론으로 자리 매김을 한다. 남부의 백인 배송업자들이 “시카고 디펜더”를 보이콧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자,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모든 철도 회사에 호화 기차 (Pullman sleeping rail car)를 공급한 풀만 철도 회사의 흑인 승무원 --Pullman porters라 부른다--들이 몰래 메이슨-딕슨 라인 (Mason-Dixon line) 이남의 남부 지역으로 신문을 반입시켰다. 그리하여, “시카고 디펜더”는 남부의 흑인 이발소에서, 교회에서 4-5명이 돌려가며 읽고 또 읽었던 신문으로, 그 전성기에는 구독자 수가 50만을 능가하였으니, 애독자는 최소 2백만명 이상은 되었을 것. 당연히, 남부 지역의 Ku Klux Klan은 “시카고 디펜더”의 반입을 원천봉쇄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여러 로칼 정부에서는 이 신문의 구독을 불법화했을 뿐 아니라 “시카고 디펜더”를 돌려가며 읽거나 소지하는 것 자체를 범죄행위로 간주하고 처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인들이 반대하면 할 수록 “시카고 디펜더”에 대한 남부 지역 흑인들의 애착은 산불처럼, 초원의 불길같이 넓고 넓게, 깊고 깊게 번져 나갔다. 북부 지역에서 발행되는 흑인 신문인 관계로, “시카고 디펜더”는 남부의 흑인 언론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훨씬 적나라하게, 더 신랄하게 흑인들이 당하는 잔인한 차별을 고발할 수 있었으며 사회경제적 차별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였다.
에봇은 그 당시 흑인을 지칭하던 “Negro (black)”라는 말 대신에, 흑인을 “the Race”, 그리고 흑인 남녀는 “Race men and Race women” 이라 불렀다. “시카고 디펜더”는, 발행부수가 100,000부수가 넘은 첫 번째 흑인 언론 (1917년), 만화를 전면에 실은 첫 번째 흑인 신문, 그리고 건강 코너를 마련한 첫 번째 흑인 신문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흑인 언론을 개혁하여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본보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20년에 주간지 “시카고 디펜더”의 발행부수는 250,000부이다.
“시카고 디펜더”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캠페인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한 남부 흑인들의 북부대이동 (the Great Migration)이었다. “시카고 디펜더”는 기차 스케줄과 구인광고를 신문에 실었고, 반-흑인정책이 법제화 되어있는 남부지역에 남아있는 위험성을 상기시키며 남부를 떠나기를 독려하였다. 또한, 앞서 북부에 정착한 친지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게재하였다. 이 1차 흑인대이동으로 총 백 오십만 명의 흑인들이 루이지애나, 알라바마 같은 the deep South를 떠나 북부-중부의 대도시로 이동했는데, 이 중에 최소 110,000 명의 흑인이 시카고에 정착하면서 시카고의 흑인 인구가 3 배로 껑충 뛰는 일이 벌어진다. 동시에, “시카고 디펜더”는 성공한 흑인들의 이야기, 북부 도시에서의 흑인 차별과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흑인 군인들의 차별 대우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흑인의 전반적 권익 향상을 도모했다. 1923년에 “시카고 디펜더”는 흑인 아동들을 위한 Bud Billiken Club을 조직했다. 지금은 시카고에서 가장 큰 행사가 된 Bud Billiken Parade and Picnic이 이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시카고 디펜더”가 1928년에 공화당 지지 (endorsement)를 거부하면서 남북전쟁 이후 지속되었던 흑인들의 공화당 철통지지가 흔들리기 시작한 점도 잘 알려져 있다. “시카고 디펜더”의 사설 (editorial)은, ‘”공화당은 2차 Ku Klux Klan와 “Separate but Equal”을 내세운 Jim Crow 사회를 후원, 묵인함으로 흑인의 인권과 시민권 향상에는 완전 무관심하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05년에 단돈 25센트를 투자하여 “시카고 디펜더”를 창간하였던 에봇은 백만장자로1940년에 72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일찌감치 후계자가 되어 오랜 기간 훈련 받은 그의 조카, 생스탁 (John H. Sengstacke) 이 뒤를 이어 흑인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한 언론 매체로 “시카고 디펜더”를 이어갔다. “과연! 그 삼촌에 그 조카” 답게 생스탁은 2차세계대전 기간 군대의 흑백 통합을 위해 힘썼기에 (에드가 후버의) FBI의 매서운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2차대전 종전 후에 트루먼대통령의 군대의 흑백 통합 커미션에 임명되었다. 생스탁은 전국 신문 발행인 협회 (National Newspaper Publishers Association)가 된 흑인 신문발행인 협회 (National Negro Publishers Association)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1967년에 그의 사설에서, “흑인 인권 운동에 큰 공헌을 한 쥬이시 아메리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반유태인 (anti-Semitism)의 사조를 경고하기도 했다. 위에 열거한 에봇이 주도했던 시카고에서의 활동도 확대 지속하였으니, 1997년에 타계한 생스탁을 하늘에서 삼촌 에봇은 얼싸안아 주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1956년에 “시카고 데일리 디펜더”로 되어, 곧장 가장 큰 흑인 언론매체가 되었던 “시카고 디펜더”의 역대 필진에는, 소설가 모트리 (Willard Motley), 흑인으로는 최초로 플리쳐 상을 받은 시인 브룩스 (Gwendolyn Brooks), 휴즈 (Langston Hughes), 언론인 웰스 (Ida B. Wells). 윌슨 (Alex Wilson), 로맥스 (Louis Lomax), 페인 (Ethel Payne), 라이트 (Richard Wright) 등 내노라 하는 흑인 유명 인사가 즐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