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준 목사 / 두란노 침례교회>
안녕하세요, 형제님.
형제님도 들으셨지요? 지난 주 동부 지역에 지진이 있었다는 소식을 말입니다. 버지니아 주에서 발생한 5.8 강도의 지진이 워싱턴 DC, 뉴욕 등의 대도시에도 영향을 주어서, 많은 사람들이 대피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지질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동부지역도 더 이상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하니,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걱정이 피부에 와닿습니다.
형제님, 최근에 사람들이 만들어낸 재앙들과 자연 재해들이 자주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종말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요.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으니 하루하루 그날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참 신앙인들은 ‘종말’, ‘죽음’, ‘마지막’과 같은 단어들을 두려워하진 않습니다. 이 세상의 끝에서 시작될 새로운 시작이 현재의 삶 보다 훨씬 아름다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해 이 땅이 다시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싸이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났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싸인 이 땅의 모습을 뚜렷하게 그리고 있는 겁니다. 오늘부터 요한이 기록한 인물들을 순서대로 형제님과 함께 만나보려고 합니다.
형제님,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일까요? 요한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유대교 안의 한 분파로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달달달 외웠고,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과 불쌍한 이웃을 돕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에 덧붙여서 요한은 니고데모를 유대인의 지도자라고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도자에 뽑힐 정도라면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안에서도 매우 출중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성경 지식과 사회적 지위를 사용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스렸을 겁니다.
형제님, 전 니고데모를 용기있는 사람으로 봅니다. 그가 속해 있는 바리새파는 예수님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예수님을 없애버려야 할 이단 정도로 판단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에 상관없이, 니고데모는 자신의 성경 지식을 토대로 예수님에 대해 다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료들에게 들키면 왕따를 당할 수도 있는데, 남 눈치 보지 않고 직접 예수님을 만나러 나온 겁니다. 이런 용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귀중한 진리를 얻게 됩니다.
형제님, 니고데모는 또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막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을 이루고 있는 30대의 젊은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 앞에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한 학생으로 나갔습니다. 그 겸손함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일대 일 특강을 받을 수 있었고, 구원의 진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께도 예수님을 알아가는 이 귀한 작업에 니고데모와 같은 용기와 겸손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가만히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드러나는 니고데모의 무지 때문입니다. 형제님, 니고데모는 구약 성경을 달달달 외우는 당시의 석학 중 한 사람이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앞에선 무지하기만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주셨지만, 니고데모는 도대체 알아듣질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당장 묻습니다. “아니 거듭나다니요. 이 큰 사람이 어머님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거듭나다’, 영어로는 “born again”이라고 해석되는 이 간단한 단어를 당시 석학의 머리로도 도저히 풀어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얘기가 통하지 않자, 예수님께선 니고데모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의 이 지적 속에서 당시의 영적 상태를 보게 됩니다. 구약 성경을 달달달 외우는 지도자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조차 모른채 지금까지 살아왔던 겁니다. 유대교에서 하나님 나라는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모른채 지금까지 살아온 겁니다. 지도자들이 이 지경이니 보통 사람들은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이 진리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영적 상태를 진리가 감추어져 있던 시대, 즉 혼돈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절대 기준, 또는 절대 가치가 되는 진리가 없으니, 이런 저런 사람들의 생각들이 진리처럼 포장되어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었던 겁니다.
형제님,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의 혼돈 상태를 종식시켜 주셨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주신 겁니다. 제가 적은 다음의 말씀을 크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질 때까지, 말씀이 담고 있는 진리가 믿어질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길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지, 또 죽음은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지 등등을 두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한 길을 제시해 왔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종류의 시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 그 수많은 시도들이 우리에게 남겨 놓은 것은 혼돈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늘 부딛쳐야 하는 한계의 벽에 문을 닮은 그림만 그려 놓았을 뿐입니다. 그림에 불과한 문을 열고 한계 밖으로 나갈 수는 없잖아요?
혼돈 속에서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진짜 문을 보여주신 겁니다. 형제님, 그 진짜 구원의 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용기와 겸손으로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진짜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 많은 성경 지식으로도 찾지 못하던 구원의 문을 발견했을 때, 니고데모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을 겁니다. 그래요, 형제님. 이 세상에 진리는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진리를 형제님의 가슴에 깊이 심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의 가슴 벅찬 감동을 형제님의 것으로 만드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음 편지를 드릴 때까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으로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